귀족 말고 뱃사람 그린 화가… 그건 혁명이었다

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일리야 레핀, 1884~1888, 트레치야코프미술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일리야 레핀, 1884~1888, 트레치야코프미술관)
ⓒ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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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색은 남루하지만 눈빛이 살아 있는 남자가 들어온다.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이 남자의 어머니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엉거주춤 일어서고, 흰 앞치마를 두른 하녀는 문을 열어주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피아노를 치던 아내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려 바라본다.

그 와중에 아이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아빠를 알아본 소년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역력하다. 어린 소녀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빠와 헤어진 걸까. 아빠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무서움에 몸을 웅크리고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모두의 시선 한가운데 그가 있다.

그는 왜 뱃사람을 그렸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해 놓은 듯 드라마틱한 이 그림은 일리야 예비모비치 레핀(1844~1930)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이다. 유형지에서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제목부터 뭔가 스토리가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고, 잡혀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가 돌아왔다. 예고 없이 돌아온 가장을 마주하는 가족의 놀람,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두려움, 본능적인 반가움이 뒤엉켜있다. 돌아온 그의 표정과 번뜩이는 눈빛은 굴하지 않는 당당함,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신념이 무너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레핀은 몸동작과 표정을 통한 심리묘사의 달인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나면 웬만한 작품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에너지가 세다.

레핀은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추구예프에서 태어났다.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그는 이콘 화가(교회에 색을 칠하고 형상을 그리는 화가)인 부나예프의 견습생이 된다. 당시 나이 15세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예술이란 대중이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예술가는 대중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화와 초상화로 돈을 모은 그는 1863년 황립예술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한다. 다음 해에 황립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인 크람스코이를 만난다. “화가는 사회 현상의 비평가라네. 사회의 중요한 면들을 표현해야 하지.” 크람스코이는 예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그에게 각인시켰다.

아카데미는 신화나 성서 이야기 같은 주제를 그릴 것을 요구했다. 레핀은 그들의 요구에 따르는 한편,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한 통찰이 담긴 작품들도 그렸다.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을 그려 콩쿠르에서 금메달 획득, 6년 동안 유럽을 여행할 수 있는 국비 유학생이 됐다. 유학에 앞서 그는 화가로서 명성을 가져온 역사적인 작품을 그리게 된다.

햇살이 좋은 어느 날, 레핀은 친구들과 배를 타러 네바강에 갔다. 화려한 별장들, 우아한 원피스를 입은 여인들, 단정한 학생들의 제복 사이로 낡은 옷을 입고 해안을 배회하는 뱃사람 무리를 보게 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옷감의 색을 구별할 수도 없는 썩은 옷을 입고, 굵은 밧줄이 묶여 있는 맨 가슴은 벗겨진 채 태양에 그을려 갈색으로 변한 사람들.

아름다운 강가와 대조적인 이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진짜 뱃사람들을 찾아 볼가 강으로 갔다. 2년여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무거운 짐을 끄는 인간의 몸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며 많은 스케치를 했다. 마침내 등장인물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즉, 인물 하나하나를 관람객의 시선에서 놓치지 않는 대각선 구도로 그려진 ‘볼가 강의 뱃사람들’이 탄생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그림

 

 볼가 강의 뱃사람들(일리야 레핀, 1870~1873, 국립 러시아박물관)
 볼가 강의 뱃사람들(일리야 레핀, 1870~1873, 국립 러시아박물관)
ⓒ 국립러시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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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핀의 ‘뱃사람’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놀라움이 엄습했다. 주제 자체도 충격적이다. 상층 계급이 민중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뱃사람을 주제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이 될까. (…)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였다. 뱃사람은 뱃사람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림 속의 그 누구도 관람객을 향해 ‘이것 보시오, 나는 불행하오. 당신은 민중에게 빚을 지고 있소!’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이것은 화가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예술의 사회적 책임에 충실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 배를 끌며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만 관람객은 이들의 생명력에서 어마어마한 민중의 힘을 느낀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솟구친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림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시대를 넘어 현실을 비추는 그림.

1873년 국비 유럽 여행이 시작됐다. 그의 작품 ‘볼가 강의 뱃사람들’이 전시돼 큰 성공을 거둔 빈을 필두로 베니치아, 로마를 거쳐 파리 몽마르트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파리는 인상주의가 한창 꽃을 피우던 시기다. 레핀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파리에 마음을 빼앗긴다. 마네 풍의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인상주의를 받아들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현하는 데도 즐거움을 느꼈다. 그의 생각을 담은 편지에 스승인 크람스코이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해할 수 없소. (중략) 당신에게는 예술에 관한 아주 강한 신념과 민중적인 색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 우크라이나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은 (…) 거의 원시 기관과 같이 육중하고 강력한 것을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소.” – 크람스코이의 편지

“제 기억으로는, 제가 원시 기관만을 그리겠다고 맹세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아니요, 저는 제게 감동을 주었던 모든 것을 그리고 싶습니다.” – 레핀의 답장

레핀은 창작의 자유와 보다 넓은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그에게 주제의 연속성이나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옳은 것도 정당한 것도 좋다. 그러나 자신을 잃지 않는다. 나는 다양한 것을 좋아한다”며 일축했다.

1876년 아직 여행 유효기간이 남은 상태에서 그는 돌연 귀국한다. 파리에서의 경험은 신선한 자극이 됐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외려 자신의 화풍을 더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현 시대를 표현하는 그림에 자신의 재능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러시아적인 가치를 둔 작품들과 습작들을 그리며 전열을 가다듬은 뒤, 당시 러시아를 휩쓸고 있는 변화의 물결, 즉 농노제 폐지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을 담은 ‘쿠르크스 지방의 십자가 행렬’이라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이후 혁명가들을 표현한 ‘선동자의 체포’, ‘고해를 거절하다’ 그리고 혁명의 테마 중 백미로 꼽히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와 같은 역작들이 줄줄이 나왔다. 하나같이 눈을 뗄 수 없는 걸작들이다. 레핀은 대상자의 심리묘사를 통해 관람자의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어버린다.

혁명가들의 화가

그의 이런 작품들이 이동파 전시에 합류되면서 이동파 전시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당시 전시는 아카데미전시가 주류를 이룬 가운데 이동파 전시가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아카데미 전시의 주제가 성서나 신화이고 전시도 대도시에서 이뤄진 반면, 이동파 전시는 현실을 주제로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지방에서도 볼 수 있는 큰 장점을 지녔다. 그들의 이름이 ‘이동파(wanderers)’가 된 이유다. 1882년 레핀이 이동파에 합류한 사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마주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레핀은 또한 초상화의 대가이다.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같은 문학가, 스타소프 같은 예술 비평가, 왕벌의 비행을 만든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 그리고 ‘전람회의 그림’으로 유명한 작곡가 무소륵스키 등, 러시아 문화계를 이끈 엘리트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그림 중 하나가 무소륵스키의 초상화이다.

 

 무소르그스키의 초상(일리야 레핀, 1881,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무소르그스키의 초상(일리야 레핀, 1881,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 문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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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륵스키는 독창적인 재능으로 서유럽 사람들이 러시아 음악에 관심을 두게 만든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런 엘리트의 모습치고는 뭔가 이상하다. 이 그림은 무소륵스키가 모든 걸 다 잃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 군부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모습이다.

친구였던 레핀은 이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렸다. 그의 모습이 밖으로 튀어 나올 듯이 큰 이유는 병실이 매우 좁았기 때문이다. 캔버스 바로 앞에 앉아있는 그를 그리다 보니 인물이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레핀은 나흘 동안 그를 그렸고, 작업이 끝난 지 이틀 만에 무소륵스키는 사망한다.

헝클어진 머리, 지저분한 수염, 환자복 위에 걸친 가운, 술에 전 붉은 코, 광기 서린 눈동자. 제도에 저항하다 몰락한 위대한 작곡가를 이보다 더 선연히 표현할 수 있을까. 이 그림은 오랫동안 무소륵스키의 이미지로 통용됐다.

레핀은 러시아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초상화를 의뢰받는다. 러시아 화가로서 가장 명예로운 순간이다. 크기가 가로 9미터에 달하는 대작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1901년 5월 7일에 열린 국가 의회'(1903)를 그린 후 레핀은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된다. 실질적으로 거장으로서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레핀은 러시아를 떠나 말년을 핀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보내고 86세의 나이에 눈을 감는다. 레핀이 살았던 핀란드 쿄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이름을 ‘레피노’로 개칭했다.

*참고서적 :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 레핀 외, 씨네스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립니다.

호칭 싸움의 끝, 나는 “예수 같은 며느리”가 되었다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는 결혼 이후 가족 내 성차별적 호칭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워온 청오리(활동명)의 경험을 풀어낸 에세이로, 총 4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이 글은 그 마지막입니다. – 기자 말

시아버지의 문자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일을 키우면 일이 늘어나고, 일을 줄이면 일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너무 문제를 키워온 게 아닌지… 나도 호칭 개정 운동에는 동의하지만 이렇게 주변의 가까운 관계들을 해치는 점을 생각할 때, 적절한 변경 용어가 표준어로 정해질 때까지 좀 기다려주지 않겠니. 하나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를 잃지 않도록… 어젯밤 통화 중에 마음이 격해져서 제멋대로 쏟아 놓은 말들이 몹시 후회되고 미안하구나. 타법이 늦어서 밤새 썼다가 보낸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간밤에 저 역시 화가 나 있어서 무례했던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남편 형과 부딪치는 지점은 호칭만이 아니라 서열이라는 문제 자체예요. 어젯밤에 남편 형이 전화를 걸어서 결혼했으면 당신은 내 아랫사람이라고, 이 집의 큰사람으로서 말하는 거라기에 웃어버렸습니다. 저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가정이 평화롭기를 바라다니 이상합니다.’

‘미안하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데. 내가 주의를 주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해볼게.’

점심시간이 됐을 때 남편 형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제수씨. 저 △△입니다. 제가 이렇게 전화를 드린 이유는… 사과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한 말 때문에 제수씨가 상처받으신 부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제수씨를 저보다 낮은 사람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

“네. 사과 잘 받겠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서로 잘 모르다 보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쪽에서 생각할 때는 제수씨가 너무 일방적으로 저희에게 호칭을 강요하니까….”

“저는 처음에 호칭 얘기를 시작할 때 두 사람의 의견을 얘기해달라고, 경청하겠다고 말했을 텐데요?”
“저희에겐 그런 게 강요로 느껴진 거죠. 대답 안 하면 거절이라고 이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또 전에 동생이 사과한다고 우리한테 문자를 보냈을 때도, 호칭에 대한 얘기를 우리에게 다시 설명하려고 드니까 왜 싫다는 사람에게 계속 얘기를 꺼내냐, 이런 생각이 든 거죠.”

“그럼 △△씨는 제가 어떻게 해야 했다고 생각하세요? 두 사람이 저에게 불편함을 참으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는 전에 동생한테 많이 말했어요. 제수씨도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이렇게 공식적으로 얘기를 꺼내는 것보다 저한테만 살짝 말씀하셨으면….”

“제가 듣기에는 아내를 좀 바보 취급하시는 것 같네요. 저랑 남편, △△씨만 얘기하는 건 한 사람을 따돌리는 일 아닌가요?”
“아무튼 제 아내는 이런 얘기를 이해 못 해요. 제수씨는 어떤지 모르지만, 제 아내 집은 대가족이에요. 모임도 자주 있고 그러다 보니까 질서가 잡혀야 돌아가거든요. 윗사람, 아랫사람 딱딱 나뉘는 식으로… 그래서 제가 부모님한테도 좀 나서서 정리해달라고 했는데, 제수씨 편만 드니까 저희 쪽에서는 서운했던 거죠.”

“어떤 정리를 바란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시부모님이 제 윗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요. 부모님은 어른일 뿐이죠. 노인에 대한 공경과 배려를 받을 수는 있지만, 부당한 일을 저에게 시킬 권리는 없죠.” 
“물론 그렇죠. 그렇긴 한데… 제수씨보고 저희를 윗사람이라고 떠받들라는 게 아니라, 사회의 법칙이라는 게 있잖아요?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고요. 가계도를 보면 아버지 밑에 형이 있고, 그 밑에 동생이 있고….”

“시부모님은 윗사람이 아니라 어른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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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시부모님이 제 윗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요. 부모님은 어른일 뿐이죠. 노인에 대한 공경과 배려를 받을 수는 있지만, 부당한 일을 저에게 시킬 권리는 없죠.”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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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에서 형하고 동생은 나란히 있죠.” 
“아무튼 저는 교과서에 나온 대로 얘기했을 뿐이에요. 저희가 윗사람 노릇을 하겠다는 게 아니고요. 제수씨는 저희보다 그런 부분에 예민하니까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제 아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걸 이해를 좀 해주시면 좋겠어요. 전에 동생은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사회가 바뀌는 거라던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반대로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사회가 바뀐다고 해도 가족끼리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거죠. 저는 처음에 호칭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이거 까닥하면 큰일 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예상했던 것 중에 최악의 결과가 그대로 벌어진 거예요. 제가 바라는 건 이제 서로 좀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면 얘기가 나올 필요가 없겠죠.” 
“그쵸. 건드리지 않는다면.”

“호칭은 바꾸는 거고요.” 
“네…. 사실 이 얘기가 나온 지 꽤 됐잖아요? 저희는 솔직히 지쳤어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는 못 하겠고, 더 이상 큰 싸움 없이 조용하게만 지냈으면 합니다.”

“우리가 원래 친한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그래도 이번 일로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고 생각해요. 사과 감사합니다.” 
“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아버지는 주말에 찾아와서 자신의 말을 용서해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들들을 잘못 키워서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까지의 일을 돌이켜보면, 제일 큰 문제가 내 안이함 때문이었던 것 같아. 나는 무사안일주의랄까… 그저 하루하루가 무사하면 그뿐이라 생각하고 사니까. 괜히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덮어두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를 섭섭하게 했겠다 싶어.”

시어머니는 자신이 시아버지를 혼냈으니 기분을 풀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날 우리들은 시아버지의 제안으로 드라이브를 하러 갔다. 맑은 날씨였다. 자동차는 강변북로를 지나갔다. 한강의 수면 위로 햇빛이 반짝였다. 시어머니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나는 이런 풍경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데… 너희들도 좋은 것만 보고 살아. 남을 바꾸려고 해봤자 나만 괴로운 거야. 항상 주어진 것에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시아버지는 농담조로 원래 선지자는 괴로운 거라고, 우리 집안에 예수 같은 며느리가 들어왔다며 껄껄 웃었다.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서 시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호칭을 바꾸자고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일은 나 자신이 분노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남편 형 부부나 시부모님에게서 사과를 받고나면 이 싸움이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모든 일이 작은 소동에 불과했다는 듯이. 내 상처에서 나조차 눈을 돌린다면, 누가 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을까.

나는 시가 식구들이 모두 사과를 한 후에도 내 안에서 똑같은 온도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나를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 힘을 잘 다루고 싶었고, 싸움의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자동차 거울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남편의 얼굴이 비쳤다. 나는 내가 장소를 잘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배운 싸움의 기술, 그 결과는…

물론 이 싸움이 언제나 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종종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남편에게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나는 이제 이 사회가 여성들에게 로맨스와 정상 가족 판타지를 얼마나 치밀하게 주입해왔는지 알겠어. 능력도 변변찮은 주제에 결혼 안 하고 어떻게 살 거냐고 닦달하던 엄마부터, 결혼해야 독립된 성인으로 봐주는 사회 분위기, 남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경험이라고 외치는 온갖 미디어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텔레비전에서 나왔던 노래는 온통 짝을 찾아서 좋네, 짝을 잃어서 슬프네 하는 거고, 동화책부터 할리우드 영화까지 인생의 절정은 결혼식이라고 보여줘. 요새 내가 어떤 기분이냐 하면, 핀볼 게임기 안에 들어가 있는 구슬이 된 것 같아. 핑하고 튕기면 아차 하는 사이에 결혼이라는 골로 떨어지는 거야. 당신이 이 기분을 알기나 해?”

“당신 형이 그딴 소리를 늘어놓을 때 당신이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것도 화가 나. 그러고 나서 뭐라고? 그냥 형이 떼쓰는 거로만 들려서 자기는 별로 화가 안 난다고? 그런 말 하는 형이나, 사과하라는 자기 부모님이나, 당신이나, 모두 가해자가 아닌 줄 알아? 다들 입장이야 있지.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던 이유도 알아. 그런데 결과적으로 모두가 바랐던 것이 똑같았다는 점이 소름 끼쳐. 당신들 모두 내가 입 다물기를 원했다는 걸 모를 줄 알아?”

한번은 저녁에 집으로 들어가서 우르르 화를 쏟아내자 남편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말했다.

“부모님이나 형도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나는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찾으려고 고민했던 것뿐이야. 내가 늘 자기를 지지했다는 걸 알잖아… 나는 자기 이야기 듣고 페미니즘 공부도 하고, 컵도 돌리고, 피켓도 만들고, 시위도 따라갔어. 회사 일 때문에 바쁘고 정신없는데 그랬다고. 오늘도 집안일 한다고 온종일 끙끙댔는데… 내가 이 모든 일을 누구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해?”
“나를 위해서 한다고? 하지 마. 그런 시혜적인 마음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마. 이게 나만의 문제야? 당신이 지금까지 나를 돕기 위해서 모든 걸 했다고 생각해? 이건 내 일이 아니야, 너의 일이야. 사회의 차별 앞에서 괴로워하는 한 인간 앞에서, 네가 어떤 태도를 취할 거냐라는, 네 삶의 문제라고!”

“나도 알아. 아는데… 나도 할 수 있는 만큼 했는데, 그래도 나는 당신 삶을 착취하는 사람이고 가해자일 뿐이라면… 이제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거지?”

흐느끼는 남편 앞에서 나는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고단함이 밀려왔다.

나는 이 사람이 나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을 약점이라 생각하는 걸까? 그것을 빌미 삼아서 한 사람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는 걸까. 한국 사회의 여성과 남성이라는 자리. 며느리와 사위라는 자리. 동서와 도련님이라는 자리. 그리고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나와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울고 있는 너. 이토록 울퉁불퉁한 지형 위에서 너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남편 형은 나에게 사과를 하고 며칠 후에 단체대화방에서 나갔다. 남편에게 전해 듣기로 단체대화방을 없애는 것이 시아버지의 바람이라고 했다. 나는 시아버지가 생각했던 ‘근본적인 해결책’이 이것이었나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시아버지는 ‘자꾸 얘기가 오가니까 서로 감정이 상해서 싸움이 커졌다’는 생각에서 끝내 나아가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이 호칭 싸움에 얽힌 사람들이 생각해보기를 바랐다. 시아버지는 나와 전화로 싸울 때 자신이 했던 말들은 진심이 아니라고 했다. 남편의 형 역시 나를 낮은 위치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그것은 화가 나서 나온 말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믿기 때문에 궁금했다. 시아버지의 ‘운동권이냐’라는 질문은 ‘메갈이냐’라고 이름표를 붙이는 사람들의 말과 무엇이 다를까? ‘호칭을 바꾸자는 건 우리 집을 우습게 보는 거다’라는 남편 형의 말은, ‘호주제를 폐지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던 옛 노인들의 목소리와 얼마만큼 거리가 있을까?

살아온 경험도 세대도 다를 텐데 그들의 입에서는 한결같이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진심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런 말을 뱉고야 마는 시아버지와 남편 형의 모습이 흥미로웠고,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길 바랐다.

싸움말고, 외면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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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열 구조를 벗어나서 한 개인으로 만나는 가족.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아닌 수평적인 관계로 만나는 가족. 우리에게는 한 번도 그런 매뉴얼이 주어진 적이 없으므로, 오랜 시간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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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간의 싸움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다. 글을 쓰는 지금 나와 남편, 시부모님, 남편 형 부부 이렇게 세 집단은 서로를 피하며 살고 있다. 나는 언젠가부터 시부모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왕래를 멈추게 됐다. 남편 형 부부는 시부모님이 자신들을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는다며 발길을 끊었다. 남편은 형과는 일절 연락하지 않고 지내고, 부모님과는 드물게 만난다.

지난 명절에 시어머니는 남편을 통해서 나와의 관계를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지 생각해봤다. 서열 구조를 벗어나서 한 개인으로 만나는 가족.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아닌 수평적인 관계로 만나는 가족. 우리에게는 한 번도 그런 매뉴얼이 주어진 적이 없으므로, 오랜 시간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마지막으로 시가 식구들을 한 데서 봤던 자리는 남편 사촌동생의 결혼식이었다. 그날 남편은 회사에 일이 있어서 나 혼자 결혼식에 참석했다.

야외 결혼식장 입구는 하객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방명록에 내 이름과 남편 이름을 쓰고 축의금 봉투를 전했다. 한복을 입은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반갑게 다가와서, 남편 형 부부도 와 있다며 귀띔했다. 그때는 내 이야기가 나온 인터넷 기사를 단체대화방에 올리며 한창 싸우던 시기였다.

나는 시어머니가 이끄는 대로 신부대기실을 찾아갔다. 남편의 사촌동생은 흰 천이 드리워진 신부대기실에 앉아서 꽃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돌아 나오는 길에 나는 남편의 형 부부와 마주쳤다. 남편 형의 아내는 유아차 손잡이를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남편 형의 아내는 대답했다.

“네.”

 


나는 그 사람의 굳은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움켜잡고 있는 걸까? 무엇을 놓지 않으려고 힘을 주고 있기에 이토록 딱딱한 표정을 짓는 걸까? 시어머니는 하객석의 앞줄로 나를 데려갔다. 어디선가 나타난 시아버지는 남편 형 부부를 뒷줄로 이끌었다.

하객석 앞줄엔 경조사에서 몇 번 만났던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나는 남편의 할머니와 시어머니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입장 음악이 울리자 신부와 신랑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왔다. 주례 대신 신부의 어머니가 인사말을 했다. 결혼식장이 너무 아름다워서 결혼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예약부터 했었다는 농담. 두 사람의 앞날에 행복이 깃들기를 바란다는 축복의 말. 남편의 할머니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시어머니도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나는 신부와 신랑 두 사람이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삶의 풍파를 함께 감당할 사람을 찾았다는 안도감, 내 삶을 나눌 이를 찾았다는 기쁨에 부풀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와 남편이 그랬듯이.

신부 어머니의 축사 후에 신부와 신랑은 결혼서약문을 낭독했다. 각자가 직접 쓴 결혼 생활에 대한 다짐이었다. 남편의 사촌동생은 마이크 앞에 서서 또박또박 읽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걸어갈 나날 동안 언제까지나 당신을 진실하게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웃고, 당신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겠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그러했고 당신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자상한 어머니로, 효성스러운 며느리로 살겠습니다. 항상 당신을 응원하는 든든한 아군으로, 당신이 기댈 수 있는 현명한 아내로,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살겠습니다.”

[나의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

① ‘가족 호칭’ 바꾸자 하니 돌아온 말 “넌 우리 집이 우습구나?”
② “그건 자격지심 아니야?” 남편의 형은 말했습니다
③ “결혼했으면 당신은 내 아랫사람이야!”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반말할 수도 있지’? 누가 그런 권리를 줬나

 

 그럼 왜 이렇게 꼰대가 되는 걸까? 내 생각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표현욕구와 존재감 때문인 것 같다
 그냥 처음 봤으면 존댓말 쓰는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다. “왜 반말이야” 라면서 싸움이 시작되는 경우는 있어도 “왜 존댓말이세요” 라면서 싸움이 시작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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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40대 남성분을 처음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그분의 자제도 왔다. 난 당연히 처음 봤으니 존댓말을 썼고,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다가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처음 본 사람이거나 친하지 않은 경우 반드시 존댓말을 쓰고자 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와 달리 많은 사람들은 처음 본 사람을 향해 어떤 호칭을 쓸지, 존댓말을 쓸지 반말을 쓸지 고민을 한다. 노랫말만 봐도 그렇다. 015B의 1991년 노래인 <이젠 안녕>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 처음 만났던 어색했던 그 표정 속에 서로 말 놓기가 어려워 망설였지만.”

고민하지 마세요, 그냥 존댓말 쓰세요


아니, 고민이라도 하면 다행이지. 많은 이들은 처음 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반말을 한다. 특히 자기보다 어리거나 직책이 낮거나 여성일 경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놓곤 했다. 사람을 대하는 알바를 했던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성인 남성임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수 없이 반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손님들은 다 이런가보다 싶다가도, 나에게 존댓말을 쓰는 중년의 신사를 몇 차례 보면서 ‘이건 의지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후에는 반말을 하는 손님에게 ‘반말하지 말고 말씀하세요’라고 반격 아닌 반격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이런 대답을 들었다.

“내가 너 나이대의 손자(혹은 아들딸)가 있어 이 녀석아.”
“아니 반말할 수도 있지!”

‘반말할 수도 있다’라… 당신들에게 누가 반말할 권리를 주었나. 반말하지 말라고 항의할 때마다 나 같은 손자가 있다는 말을 하는 어르신들을 몇 분을 봤는지 이젠 기억도 안 날 지경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겐 자기보다 나이가 적으면 당연히 반말을 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있는 것이다. 사실 60~70대 되는 분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40~50대조차도 스스럼없이 반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초면인 경우에 반말을 할지 안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보자마자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사람들이나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반말을 해도 된다는 암묵적인 인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보다 사람들이 더 조심성 있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남을 대할 때 너무 조심성이 없다. 존댓말 하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한 가장 손쉽지만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초면에 반말하는 사람이 어떤 방법이건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대화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적어도 내겐 어렵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러니까 지위고하와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그냥 처음 봤으면 존댓말 쓰는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다. ‘왜 반말이야’라며 싸움을 시작하는 경우는 있어도 ‘왜 존댓말이세요’라며 싸움을 시작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이것은 갑질 문제와도 연결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신문을 장식하는 ‘높으신 분들’의 갑질에는 분노하면서, 왜 일상에서는 쉽게 반말을 하는 걸까? 그건 갑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견과류 간식을 봉지째로 담지 않고 제공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비행기를 회항시킨 일보다는 ‘반말 정도는 할 수 있지 내가 너 나이만 한 자식이 있는데’라면서 당당하게 구는 사람들이 적어도 내게는 더 위협적이고 모욕적이며 문제다. 그들 중 일부는 아마 신문을 장식했던 ‘땅콩 회항’ 사건의 가해자를 욕하지 않았을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최근 불거진 국회의원 갑질 논란 때문이다. 사건의 전말은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지난 20일 김포공항 보안 요원 김모씨가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가 ‘이 새X 근무 똑바로 안 서네’라고 욕하고 고함을 쳤다는 것이다. 

22일 김 의원은 입장문을 내 욕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요구를 한다고 보안요원에게 항의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선일보>의 24일 보도에 따르면 김씨는 신분증의 위변조 여부를 확인해야 하니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김 의원은 “나는 꺼내 본 적 없으니 규정을 찾아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22일 입장문에서 김씨의 신분증 제시 요구를 ‘갑질’이라고 규정했다. 

사실 나는 이 일을 보면서 많이 의아했던 게, 실제로 김 의원이 여태 신분증을 제시해본 적이 없을 수는 있는데 왜 반말로 보안요원을 대하면서 ‘공사 사장한테 전화하라’고 하느냔 말이다. 그러니까 설사 보안요원이 실수했다 하더라도 김정호 의원은 적어도 국회의원이라면 더욱 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것이다. 공항공사의 협력사 직원이면 국회의원이 반말을 해도 되는 걸까? 

애초에 나는 김 의원이 언성을 높여 반말을 하지 않으면서 보안요원과 규정 문제를 두고 ‘대화’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반말은 모든 갈등의 시작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현재 김 의원의 페이스북 게시물에는 많은 누리꾼의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 중이다. 

나는 김 의원이 문제를 너무 어렵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냥, 협력사 직원이건, 본인의 지지자건, 심지어 지지자가 아니건,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놓으면서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는 국회의원 전에 이 사회의 구성원이니까 말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학생들이 주워 돌려준 지갑엔 누군가의 전재산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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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중학생들이 주워 돌려준 지갑 안에 이주민의 전재산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23일 부산의 최저기온은 영하 6도를 기록했다. 추운 날씨였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날 낮 12시쯤 부산 동부 범일동 국민은행 앞을 지나던 중학생 3명이 도로에 떨어져 있는 지갑을 발견했다. 지갑에는 5만원권 56장이 들어 있었다. 280만원이었다. 이 학생들은 112에 전화를 걸어 ”현금이 많이 든 지갑을 주웠는데 주인을 찾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파출소를 찾아가 ”우연히 주운 지갑 안에 현금이 너무 많아요. 주인을 꼭 찾아주세요”라며 경찰에게 지갑을 건넸다.

지갑 주인 A씨는 부산 동구 범일동 매축지 마을에 살고 있었다. 280만원은 A씨가 재개발사업 이주비로 받은 돈이었다. A씨의 전재산이었다. A씨는 ”찬 겨울 노숙자 생활을 할 뻔했는데 지갑을 찾아줘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A씨가 건네는 사례금도 마다하며 ”겨울 따뜻하게 보내세요”라고 인사한 뒤 파출소를 떠났다.

큰돈이 든 지갑을 보고도 ”양심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며 즉시 돌려준 학생들. 부산 서중학교 1학년인 김양현, 전민서 학생과 부산중학교 1학년 김준우 학생. 부산 동부경찰서는 이들에게 26일 표창장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인류 종말을 겨누는 10가지…인간이 쏜 화살인가

인류 문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급격한 지구온난화를 부르고 있다. 빨간색이 온도 급상승 지역.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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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 모든 생물이 거치는 과정이다. 생물 개체의 끝은 죽음이지만, 이를 종으로 확대하면 멸종이 된다. 진화과정에서 도태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화산 분출, 운석 충돌, 감마선 폭발 등 다양한 원인이 작용한다. 과학자들은 척추동물이 등장한 이후 5억년 동안 다섯번의 대멸종 사건이 있었다고 말한다. 고생대의 삼엽충, 중생대의 공룡이 이로 인해 지구에서 사라졌다.

다음번 멸종은 언제 어떻게 올 수 있을까? 역대 최고 포식자인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재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을까? 스웨덴의 글로벌챌린지재단(GCF)은 전지구적 재앙을 부를 수 있는 위험 요인을 조사해 매년 보고서를 낸다. 세계 인구의 10% 이상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를 따져 선별한다. 세번째로 낸 올해 보고서가 꼽은 종말적 재앙의 후보는 모두 10가지다.

가장 먼저 꼽은 건 핵전쟁이다. 핵폭탄 투하 지역 반경 4km 안의 생물 치사율이 80~95%다. 더 끔찍한 건 그 뒤에 오는 핵겨울이다. 핵먼지가 햇빛을 가려 기온을 크게 떨어뜨린다. 4~5년에 걸쳐 최고 8도까지 내려갈 수 있다. 농작물 재배가 불가능해진다. 이어 생화학전이 꼽혔다. 생화학 무기는 제조비용이 핵무기보다 저렴하다. 시리아 내전은 화학무기의 참상을 잘 보여줬다.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이 만든 핵먼지구름. 위키미디어 코먼스

셋째는 기후변화다. 산업활동으로 배출된 온실가스는 지구온도를 이미 1도 높였다. 2도가 넘으면 지구 곳곳이 더 강력하고 잦은 홍수, 가뭄, 한파, 태풍 등 이상기후에 직면한다. 그런데 3도 상승 가능성이 30%를 넘는다. 과학자들은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기간이 12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넷째는 생태계 붕괴다. 인간 활동이나 자연 재해가 원인이다. 자연엔 스스로 회복하는 힘이 있지만 한계가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미 한계점을 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1970년대 이후 척추동물 개체수는 58%나 감소했다. 생태계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다섯째는 전염병이다. 인류는 6세기(유스티니아누스역병)와 14세기(흑사병) 두 차례에 걸쳐 당시 세계 인구의 13~16%가 목숨을 잃는 경험을 했다. 도시화와 세계화, 내성 박테리아의 등장은 전염병의 확산 위험을 더 높인다.

소행성 충돌 상상도. 핵무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여섯째로 꼽힌 소행성 충돌이다. 보고서는 12만년에 한 번꼴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소행성은 공룡 멸종을 비롯해 3차례의 대멸종에 관여했다. 공룡을 멸종시킨 것보다 10분의 1 작은 소행성에도 수억명이 희생될 수 있다.

일곱째는 화산 대폭발이다. 고생대 페름기 대멸종의 원인이다.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대폭발은 7만4천년 전, 가장 최근엔 2만6500년 전에 있었다. 대폭발은 1만7천년에 한 번꼴로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의 예측 능력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예방법은 전혀 모른다.

여덟째는 태양 지구공학이다. 성층권에 에어로졸을 쏘아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과 열을 우주로 돌려 보내는 기술이다. 보고서는 하버드대 연구진이 첫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양날의 칼이다. 지구 기후나 생태계가 불안정해져 또다른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

아홉째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을 악용할 경우 가공할 무기가 될 수 있다. 보고서가 꼽은 마지막 위험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위험들이다. 보고서는 “상당수는 인간의 기술 개발과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현실성을 떠나 이 명단에서 중요한 건 소행성 충돌, 화산 폭발을 제외한 8가지가 인간 활동과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1만2천년 동안 안정적이었던 자연환경이 인간 활동으로 최근 50년 사이 급변했다”며 “앞으로 50년이 인류의 향후 1만년을 결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연의 법칙대로라면 앞으로 수억년 동안 지구는 거주 가능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인류는 그때까지 지구와 함께할 수 있을까? 한 해를 마감하는 시간에 지구의 내일을 생각하며 자문해 본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김정호 의원이 공항 직원에 사과했다

공항에서 신분증 확인을 요구한 직원에게 갑질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5일 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김 의원 측 관계자는 이날 뉴스1과의 통화에서 ”김 의원이 오늘 오전 직접 (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며 ”해당 직원이 상처를 받았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사과한다는 메시지를 밝혔다”고 전했다.

김 의원은 해당 직원뿐 아니라 노조 측에도 연락해 사과를 했다. 이 관계자는 ”김 의원이 공항공사 노조에도 전화를 걸어 사과를 했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또 이날 오후 5시30분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항직원에게 공식 사과를 하고 국민에게도 논란을 일으킨 데 대해 고개를 숙일 예정이다.

앞서 김 의원은 지난 20일 오후 9시쯤 김포공항에서 김해공항행(行)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중 공항 직원이 신분증을 지갑에서 꺼내 보여 달라고 하자 이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이 과정에서 김 의원이 욕설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설현이 지큐(GQ) 인터뷰에서 말한 ‘합성사진 유포자 처벌 원했던 이유’

그룹 AOA의 멤버이자 배우 설현이 자신의 합성사진을 유포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성적 수치심과 혐오를 일으키는 메시지를 보낸 네티즌들을 고소한 사건에 대해 다시 이야기했다.

설현은 24일 공개된 패션지 GQ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선례를 보이기 위해’ 망설임 없이 법적 처벌을 위한 절차를 밟았다고 밝혔다. 

″‘이 사람들이 내게 수치심을 줬으니 고소해야지’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런 범법 행위를 저지르면 큰 벌을 받는다는 선례를 보여서,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게 설현의 말이다.

설현은 특히 나이 어린 여성 아이돌로 활동하며 자신이 겪었던 불쾌한 경험들을 다른 사람들까지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말했다.

″(동료와 후배들을 지키려는 거였군요.) 제가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어요. 데뷔 초에는 신체 일부분만 집요하게 확대한 ‘움짤’이라든지, 말할 수 없는 것도 되게 많았어요. 우리, 그리고 지금 활동하는 친구들이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이 겪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그들도 그런 일들이 불합리하고 불쾌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바꿔나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는 비록 그런 일을 겪었지만, 앞으로 활동할 친구들을 위해서.”

설현은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가 합성사진 유포자 고소 입장을 밝힌 지난 3월 팬카페에 이와 같은 메시지를 담은 글을 쓴 바 있다.

″…..회사에서 말했듯이 제작 및 유포자를 꼭 찾을 거고요, 이후에 또 다른 피해자가 없도록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볼게요.

행복한 일만 가득하자고 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인 거 알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고마워요.”

합성사진을 만들고 설현에게 성적 수치심과 혐오감을 일으키는 메시지를 보낸 남성은 지난 10월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당시 소속사는 합성사진를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또다른 남성 두 명은 약식 기소되어 법원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고 밝힌 바 있다.

″내 목소리를 내는 걸로 시작해서 언젠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대변하고 싶다”는 설현의 인터뷰와 화보 전체는 여기를 눌러(링크) 볼 수 있다.

톰 행크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버거 클로스’가 됐다

 톰 행크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버거 클로스’가 된 모습이 공개됐다. 

미국 CBS는 지난 22일(이하 현지시간) ”톰 행크스가 21일 미국 캘리포니아 폰타나에 있는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 아내 리타 윌슨과 방문해 팬서비를 했다”고 보도했다. 

톰 행크스는 가게에 있던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건네며 친근하게 다가갔다. 사람들과 함께 셀카를 찍고 점심값을 계산했으며, 가게를 떠나기 전에는 드라이브 스루에서 기다리는 고객들의 햄버거 가격도 지불했다. 

‘버거 클로스’가 된 톰 행크스의 인증샷도 SNS에 속속 올라왔다. 톰 행크스가 직접 핸드폰을 들고 셀카를 찍는 사진도 있고, 드라이브 스루에 늘어선 자동차들을 가리키며 계산을 하는 영상도 있다. 

톰 행크스가 사람들에게 식사를 계산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7년 ‘코난’ 토크쇼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레이첼 페이지는 트위터에 톰 행크스가 햄버거를 쐈다는 경험담을 알린 바 있다. 레이첼은 ”톰 행크스가 50명 이상의 인턴들에게 햄버거를 가져다주었다. 단지 우리가 배고파 보인다는 이유로!”라고 적었다.

우연히 들른 양조장에서 발견한 진품명품들

한 해를 보낸다. 보내야하니 뒤를 돌아본다. 올해도 술집보다는 양조장을 더 많이 찾아다녔다. 친구보다 양조장을 더 많이 만난 셈이다. 양조장을 찾아가면 그곳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귀하게 익어가는 술을 맛보게 되니 비록 말동무가 없더라도 위안이 된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 바라보는 양조장 대표의 눈빛이 아니라도, 자꾸 술이 말을 걸고, 내가 술에게 말을 걸게 되니 적막하지는 않다.

돌아보니 그리운 양조장이 있다. 논산에 있는 양촌양조장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923년 2월 이종진 대표가 가내양조로 술을 빚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좀더 분명한 기록은 양조장 대들보 상량문에 남아있다.

독특한 양조장 건물

 

양촌양조장 건물의 상량문 ⓒ 막걸리학교


 

상량문이 적힌 양촌양조장 건물은 독특하다. 한옥식 2층 목조로 지어졌다. 현재 나라 안에 1945년 이전에 지어진 양조장 건물이 더러 있다. 몇 채나 남아있는지 조사가 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목조식 일본 제조장을 본떠서 나무판을 덧댄 벽면과 높은 천정 밑으로 통풍구를 마련한 단층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양촌양조장은 서까래와 대들보가 있는 한옥 구조를 기본으로 삼아 발효에 적합한 구조물로 지어졌다. 발효실은 사계절 온도 변화를 줄이고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반 지하에 조성하였고, 그 위로 낮은 2층을 올렸다. 2층 천정 서까래가 얹힌 대들보에는 “昭和六年辛未六月初九日” 소화 6년 신미 6월 초9일이라고 상량문이 적혀 있다. 소화 6년은 1931년이다.

내가 처음 찾아갔을 때는 상량문이 있던 방은 술병 창고여서 상량문을 올려다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상량문은 양조장에서 가장 빛나는 문구가 되었고, 예전 고두밥을 찌고 식히던 그 공간은 발효 전시 체험장으로 탈바꿈했다. 2층 바닥에 구멍을 내고 강화 유리를 대서, 아래층 발효실의 일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했다.

 

양촌양조장 2층 바닥 유리창으로 보이는 모습 ⓒ 막걸리학교


2층에서 지하 발효실로 내려가려면, 양조장 1층 작업실을 거쳐야 한다. 1층 작업실에 제성탱크가 있어 알코올 도수를 맞추고 술을 병입하는데, 그 옆에 양촌양조장의 탯줄과 같은 우물이 있다. 양조장에서는 쌀을 씻을 때, 술을 빚을 때, 알코올 도수를 맞춰 상품화시킬 때, 청소할 때에 물을 사용한다. 가까이서 물을 길어 쓰기 위해서, 양조장 안에 우물을 팠다. 우물 자리를 잡고, 우물을 파고, 그 위에 건물을 짓는 경우도 생겼으리라.

 

양촌양조장 2층 발효 전시 체험장 ⓒ 막걸리학교




우물은 제법 깊다. 신기하게도 우물 바닥에 항아리가 묻혀 있다. 처음 우물을 판 뒤로 점점 지하 수위가 얕아지면서 우물을 더 깊게 팠다고 한다. 그랬더니 모래가 나와서 다시 바닥을 파고 항아리를 묻었다고 한다. 우물물은 처음에는 두레박을 썼고, 그 다음엔 손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고, 지금은 모터를 이용하고 있다.

양촌 양조장 마당에는 큼지막한 술항아리들이 모여 있다. 항아리들이 마치 퇴역한 장군처럼 영화로웠던 옛날을 뒤로 하고, 한가롭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현재 양조장 내부의 발효 용기는 항아리에서 스테인리스로 바뀌었다. 항아리가 무거워 다루기 어렵고, 소독하기도 어려워지면서 생겨난 변화다.

양조장 이동중 대표는 변화는 받아들였지만, 차마 선대에서 쓰던 항아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집 뒤뜰에 모아두었던 항아리들을 사람들이 찾아와 신기하게 바라보자, 마당으로 불러냈다. 그랬더니 양촌양조장이 훨씬 따뜻해졌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항아리 곁에 서서 기념 사진을 찍고 간다.

보물급 유산들을 대대로 보존

양촌 양조장 이동중 대표는 9남매 중의 넷째다. 아버지 이명재도 장남이 아니지만 가업으로 양조장을 이어받았다. 양촌양조장을 창업한 그의 할아버지 이종진은 집안의 종손이 아니지만, 집안의 종손 노릇을 하면서 선대부터 살았던 마을과 집안을 지키며 양촌에서 살다갔다.

양촌 양조장에는 보물급 유산들이 있다. 처음 그 물건들은 지금의 양조장 카페에 있었다. 인내천이 보이는 양조장 카페는 예전에는 막걸리 판매장으로 쓰였던 공간이다. 한동안 창고로 쓰였는데, 이동중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물건들을 그곳에 보관해왔다.

 

충남 양촌양조장에서 나온 유물들. ⓒ 막걸리학교




나는 오래된 양조장이라 분명 오래된 물건들이 있을 것이라여겨 그 창고를 보자고 했는데, 그 창고 안에서 집안 어른이 영조 임금으로부터 직접 받은 족자, 전주에서 찍은 <동의보감>, 조선시대 스테디셀러였던 <징비록>, 술의 예법이 담긴 <향음주례>, 집안의 선산 위치도, 추사 서체 필사본 등 다양한 문적들이 나왔다.

이동중 대표는 여름이면 할아버지의 고서와 괘짝을 어머니가 그늘에 거풍(밀폐된 곳에 두었던 물건에 바람을 쐬는 것)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러나 온도 습도가 일정하지 않아 보관 환경이 좋지 못하고, 도난의 우려도 있으며, 모두 해독하기도 어려워서 내가 알고 있던 충남역사박물관팀에게 연락을 취했다. 바로 다음날로 찾아와 유물을 살펴보더니 최근 충청문화권에서 보고된 집안 유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동중 대표와 협의하여 그 유물을 충남역사박물관에 우선 기탁 보관하기로 했다. 두어 달의 조사 끝에 역사박물관팀으로부터 유물이 천여 점이 넘는다는 답변이 왔고, 이를 분석하는데 2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분석이 다 끝나면 전시회를 하자고 말했는데, 올해로 그 2년이 지났는데 해를 넘기게 되었다.

 

조선 영조 임금이 10대조 이봉명에게 하사한 군신제회도 ⓒ 막걸리학교


 

그 유물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이동중 대표의 10대조인 이봉명(1682~1746)에게 영조 임금이 하사한 군신제회도(君臣際會圖) 족자다. 이 족자는 1726년(영조 2년) 12월 29일, 영조가 희정당에서 친정(親政)하는 자리에 선온(宣醞, 술을 하사함)을 행하고 어제(御製)를 내려 신하들에게 연구(聯句)를 짓게 한 내용이 담겨있다.

영조 임금이 ‘고기와 물이 한자리에서 함께 기뻐하다(同歡魚水一堂中)’라는 구절을 내리고, 16명의 신하가 운자를 맞추어 각자 칠언으로 1구에서 4구까지 시를 지어 올렸다. 이봉명은 가장 긴 시구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편안해도 위태로움 잊지 않는 것이 참으로 성상의 뜻이요 / 安不忘危眞聖意

취하여 말을 다 하려는 것도 어리석은 충성이네 / 醉將殫語亦愚衷

지금의 세도를 누가 만회할 수 있으랴 / 卽今世道誰回挽

예로부터 임금 마음은 감통을 귀하게 여겼네 / 從古君心貴感通


 

이 족자를 만들게 된 경위를 병조참지 조명신이 족자 안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상(영조) 2년 병오(1726) 12월 29일, 친정(親政)이 끝나자 선온(宣醞)을 행하시고는 어제(御製)를 내리시고, 곁에 있던 여러 신하들에게 연구(聯句)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며 말하길, ‘이것은 선조의 고사이다. 오늘은 다만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는 날이니, 글 솜씨가 졸렬하더라도 따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각자 말로 읊조리면 이관(吏官)이 써서 올렸다. 가주서(假注書) 안상휘(安相徽)가 왕명을 받들어 구절을 모아 베껴 올리니 합 14운의 장률(長律)이었다. 아, 참으로 훌륭한 일이로다. 마땅히 널리 영화롭게 해야 하니, 그림을 그리고 족자를 만들어 집에 보관하여 영세토록 보물이 되게 할지어다. 정미년 윤 3월 일. 조명신(趙命臣)이 삼가 서를 쓰다.”




술자리는 1726년 년말에 이뤄졌고, 족자를 만든 시기는 1727년 윤 3월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92년 전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림에는 신하들이 엎드려있고, 임금의 용상은 비어있다. 임금의 용안은 감히 그리지 못하고, 비워두었던 관행을 지키고 있다.

이 족자에는 임금이 하사한 술을 지칭하는 향온(香醞), 법주(法酒), 선온(宣醞)이라는 글귀가 등장한다. 290년이 흘러 이 족자를 볼 수 있는 것은 한 자리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집안의 힘이고, 한 자리에서 오래도록 가업을 이어온 양조장의 힘이다. 우연히 한 양조장에 들렀다가, 임금이 내린 그림을 보고 그 안에서 술 향기까지 맡았으니, 어찌 양촌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한 해가 저물어가니 자꾸 그 그림과 이야기가 떠오르고, 양조장 마당에 가득한 항아리들도 떠오른다. 그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술 한 잔이리라. 양촌 양조장에서 회심의 작품으로 내놓은 무감미료 우렁이쌀 막걸리도 맛보고 싶고, 국립농업과학원과 기술 제휴하여 복원한 맑은 술 청주도 맛보고 싶다. 내일은 그 술을 택배로라도 불러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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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온 곰이가 낳은 6마리 강아지의 근황이 공개됐다(사진)

북한에서 온 풍산개 곰이가 낳은 강아지 여섯 마리의 근황이 공개됐다. 청와대는 25일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통해 지난 11월 태어난 곰이 새끼들의 소식을 전했다. 곰이는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선물한 풍산개 한 쌍 중 암컷의 이름이다.

청와대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달 태어난 곰이 새끼들의 소식을 전한다”며 “여섯 마리의 풍산개 강아지들은 잘 지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서 이제는 관저 앞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하얀 이도 제법 나서 이갈이를 하는지 물기를 좋아한다”고 전했다. 

청와대가 공개한 사진 속 강아지들은 서광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이 김정숙 여사를 통해 선물한 목도리를 두르고 관저 마당에서 뛰어다니고 있다.

청와대는 이어 “티 없이 해맑은 하얀 강아지들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성탄 보내시길 바란다”며 성탄 인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