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이 청년이 해냈다”

‘3.1 의거'(운동이라 부르면 너무 비하하는 것 같다. 국내외적으로 민중들의 참여와 희생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기자 주)는 대한민국 독립투쟁사의 전환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는 외견상일망정 식민지 통치 방식이 바뀌었고, 해외에서는 무장투쟁 방식으로 독립투쟁의 형식이 바뀌었다.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도 새로운 무장투쟁의 한 방식으로 보고 싶다.

3.1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여럿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성정부, 노령정부 그리고 상해임시정부를 대표적으로 든다. 그해 9월 세 정부가 상해임시정부와 통합하였고 초대 국무총리는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구 선생은 독립된 나라의 문지기가 되기를 바라던 분이 경무국장, 내무총장을 거쳐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으로 독립활동의 방식을 선회하였다.

임시정부에는 세 갈래의 독립운동 방식이 있었다. 이승만(李承晩)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독립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중심의 실력양성론, 그리고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중심으로 하는 무장투쟁론이다. 김구 선생은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의 절충을 시도한 독립론자로 생각된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찾는 사람들은 아마도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의 총본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건물의 외면을 보면서 그 안에 전시된 여러 가지 가구와 사진들만을 보면서 당시 임정요인들의 발자취를 보는 것으로 만족을 느낀 것은 아닌지?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 임시정부 청사를 보고 왔는데, 골목에 있는 작고 초라한 건물을 이야기 하는가 보다.

우리는 상해 임시정부 청사가 처음 있었던 서금2로(瑞金二路), 지금은 아무런 표식도 없는 곳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상하며 벅찬 가슴에 사진만 찍었다. 100년 전 그날의 모습을 알 수는 없어도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임시정부를 설립하면서 목숨을 건 투쟁을 다짐했던 지사들의 강직한 나라 사랑을 회상해본다. 그리고 옮겨진 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100년 전의 나라사랑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며,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고 미쳐 날뛰는 일본의 보수 정치인 및 일부 일본인에 대한 극일(克日)의 자세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을 때면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선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선생은 한성정부 당시에는 법무총장에 임명되신 분이다.

예관 선생이 잘못 평가된 데는 자결로 생을 마감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자결하게 된 원인을 이해하면 장엄한 죽음임을 알 수 있다.

선생은 구한말 무관학교를 나와 육군 참위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에 분격하여 자결하였다가 시신경을 다쳐 한 쪽 눈을 잃었다. 그래서 흘겨보는 것 같아서 호를 ‘睨觀(흘겨볼 예, 볼 관)’이라 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신해혁명에 가담하여 손문(孫文)과 동지적 관계를 맺으며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될 수 있는 주춧돌을 마련하신 분이다. 임정이 분열되는 것에 통분하여 25일 간 단식을 하시며 ‘정부’라는 마지막 말을 희미하게 남기며 돌아가셨다.

선생의 ‘한국혼(韓國魂)’ 정신인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예관 선생이 안 계셨다면 상하이 임시정부가 설립되기에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예관 선생의 거처에서 선생을 기리며 생각해 본다.

1932년 4월 29일.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커우(紅口)공원 의거는 대한민국의 식민지 투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거사였다. 그래서 당시 중국의 국민당의 지도부를 이끌던 장개석(蔣介石)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감탄을 했다. 이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 의거를 실행하러 가는 날 아침. 백범 선생과 매헌 의사가 조반을 들었다는 원창리(元昌里)56弄(농 : 골목)13-46号(호). 그리고 자신이 산 시계와 백범 선생의 시계를 바꾸며 1시간 밖에 남지 않은 삶을 말씀드리는 의사와 지하에서 만나자는 말을 하는 백범선생의 일들을 회상하며 잠시 숙연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윤봉길 의사의 거사 장소인 홍커우 공원으로 간다. 지금은 입구에 루쉰(魯迅)공원이라고 엇진 초서체로 쓰여 있다.

커다란 호수에는 한가롭게 낚시질 하는 사람도 있고 조그만 나룻배를 타는 사람도 있다. 매헌관 2층에서 영상을 보고 내려와 1층에 윤봉길 의사의 흉상에 뜨거운 가슴으로 묵념을 올렸다. 의사가 말씀하신 “강의(剛毅)한 사랑”을 생각하니 북받치는 가슴의 타는 열정이 목울대를 달궈놓는다. 25세의 젊은 의사는 97년의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청춘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계신다.

장개석 총통이 지었다는 윤봉길 의사 헌시(獻詩)가 떠오른다.
 

別順逆辨是非(별순역변시비) 천리를 따르고 거역함을 분별하며 옳고 그른 것 분별하여
明大義知生死(명대의지생사) 대의를 밝히고 죽고 사는 것 알며
留正氣在天地之間(유정기재천지지간) 하늘과 땅 사이에 바른 기운을 남기고
取義成仁永垂不朽(취의성인영수불후) 의로움 취하고 어짊 이루어 영원히 빛나리라.

 

 

“大韓民國三年一月一日 臨時政府及臨時議政院新年祝賀式記念撮影”

위와 같은 글자가 쓰인 흑백 사진이 있다. 1921년(대한민국3년) 1월 일에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촬영이다. 상하이 영안백화점 옥상에서 찍은 사진이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는 분들은 같은 장소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우리도 그날을 생각하며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