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까지 먹고살 걱정… 거절하겠습니다

약속한 만큼 노동하고 남은 시간, 코바늘을 뜨거나 불어를 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를 주거나 당장 쓸모가 되지 않는데도 저마다의 이유와 의미를 품고 열정을 키워갑니다. 오늘의 퇴근과 내일의 출근, 그 사이에서 나의 시간을 치열하게 붙잡는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편집자말]

14년째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퇴근하고 뭘 했지? 입사 초기엔 연애를 했고,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주로 아이들을 돌보며 함께 놀았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행복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내는 지혜롭게도 육아를 할 때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 전략을 제안했다. 1주일을 월수금, 화목토 등으로 나눠 육아를 맡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내도 나도 자신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었다. 나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 약 12시간을 쓰고, 1시간 정도 저녁식사를 하고, 6~7시간 정도 잔다고 하면 약 4~5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생긴다. 일주일에 대략 세 번 정도 이 시간을 쓸 수 있게 된다.
 

 
생각없이 인터넷을 하거나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등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내게 활력이 되는 일들을 하나씩 찾아서 하고 있다. 이 때 했던 일들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책 읽기와 서평기사 쓰기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읽기만 했는데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니 읽었던 내용도 더 오래 기억에 남고 책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에 서평기사를 쓴 지 이제 만 3년이 되었다. 그동안 책을 통해 다양한 저자들과 그들의 삶을 만났고 저자들이 오랜 세월 고민했던 흔적들을 읽을 수 있었다.

회사와 가정 사이를 오가다 보면 세상 보는 시야가 좁아지는데, 책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이어지는 생각의 파편들을 가지고 놀면서 나와 내 주변 세계에만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독서의 유익을 말하는 이야기들은 넘쳐나니 더 말할 필요는 없을 듯.

직장 다니며 육아하며 허락된 자유 시간, 뭘하지?

독서로 뇌를 단련하며 경직된 사고에 갇히지 않으려 했던 것과 함께 몸도 단련했다. 6년 전 십수년 동안 달리기를 하신 회사 선배님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그해 뜨거운 여름부터 달리기를 충동적으로 시작했다.

달리면 날숨과 들숨의 리듬에 집중하게 되면서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점차 사라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공백을 얻기 위해” 달린다고 했다.

달리면서 얻게 되는 이 비어 있는 상태는 매력적이다. 번민이 떠나고 생긴 이 여백에는 새로운 생각들이 순간순간 떠오른다. 주변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 읽었던 책, 해야 할 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들이 얼마간 빈 공간을 채웠다가 이내 사라진다.

달리지 않을 때 떠오르는 생각들이 여러가지가 뒤섞인 잡념이라면 달릴 때 만들어진 여백에 들어왔다 나가는 생각들은 한 가지 원소로 이뤄진 물질같이 순수하달까?

달리기를 할 때와 비슷하게 수영을 할 때도 잡념이 사라진다. 멀쩡한 허우대와는 달리 수영을 할 줄 몰라 물에만 들어가면 허우적 대던 사람이었는데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해 수영을 배웠다.

물을 엄청나게 튀겨대며 발차기를 열심히 연습하던 초급 강습부터 시작해 1년 10개월을 꾸준히 배웠다. 기본 영법들을 모두 터득하고 이제는 각 영법에 필요한 세세한 자세들을 신경 써가며 연습할 정도까지 실력이 늘었다.

물은 중력에 매여 움직이던 몸에 의외의 자유를 선물한다. 물론 수영을 막 시작한 초보 땐 느껴보지 못한 자유다. 항상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 불만스럽기도 한데 물에 나를 온전히 던져가면서 무엇인가에 구속된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때로는 저항을 힘으로만 극복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깨닫는다. 인생에서도 수영할 때 물을 타듯 저항에 유연한 대처가 필요할 때가 있다.

고용 보장이 안 되는 시대, 나만의 필살기
 

 유럽 분위기가 물씬 나는 퀘벡시티를 거닐며 주위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를 듣고 있으니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유럽 분위기가 물씬 나는 퀘벡시티를 거닐며 주위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를 듣고 있으니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책, 달리기, 수영 모두 내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활력을 주었고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 확장시켜 주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라는 월간신문을 10여 년 전부터 구독하고 있다. 주로 국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사들-특히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심도있게 다루는-을 접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프랑스어로 된 기사들을 번역한 글들을 보면 가끔씩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럴 때면 프랑스어를 읽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를 그리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인가! 아니었다. 매달 배달되어 오는 신문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번역된 기사들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내가 예기치 않게 사랑이 찾아오듯 5년 전 여름 휴가 때 캐나다 동부 퀘벡시티로 여행을 갔다가 프랑스어의 매력에 빠져 버렸다. 유럽 분위기가 물씬 나는 퀘벡시티를 거닐며 주위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를 듣고 있으니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프랑스라는 나라의 낭만적 이미지로 인해 뭔가 더 매력 있어 보이는 편견도 한 몫을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프랑스어를 배웠느냐고? 그렇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한단 말인가! 물론 열정이 있었다면 프랑스 어학원이라도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지에서의 갑작스런 충동은 나를 어학원까지 이끌지는 못했다. 2년여 정도 시간이 더 흘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가끔씩 들르던 인터넷 카페에 올려져 있는 프랑스어 기초문법 강좌 홍보가 눈에 들어왔다.

강좌 안내에는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정도를 3개월만 투자하면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문법을 공부하면서 생 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물론 청소년용) 원서를 읽는다고. 와… 진짜? 프랑스어가 이렇게 만만한 언어였다니.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일단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정시’ 퇴근 후 강의 장소까지 거의 2시간이 걸렸지만 새로운 언어와 그 언어에 깃든 문화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선생님은 첫날부터 빡빡하게 수업을 진행하셨다. 정말 프랑스어를 하나도 못하는 나같은 사람부터 알파벳 정도는 아는 분, 대학 때 교양 강의를 들었던 분 등 수강생 수준이 모두 달랐다. 다행히 기준은 프랑스어 생초보에 맞춰서 수업을 해주셨다. 아, 베, 세, 데… 영어와 알파벳은 거의 같은데 발음은 영 딴판이다. 게다가 이상야릇한 콧소리와 가래 뱉는 것 같은 소리, 또 결코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입모양과 혀모양.

다행히 완전 초보 수준에 맞춰주셔서 그럭저럭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을 들을 땐 정말 문법과 문장구조를 배우고 몇몇 단어만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린왕자>를 어설프게라도 읽을 수 있었다. 신기했다. 또 신기한 점은 우리나라에서 프랑스어가 매우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 아파트에서부터 빌라 이름, 크고 작은 까페와 식당들 간판에 프랑스어가 엄청 많다. 프랑스어 간판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래서 지금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느냐고? 절대 그럴 리 없다. 언어는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프랑스어 기본을 공부하고 난 이후엔 그 자료들을 기초로 스마트폰에 있는 어학 어플로 여전히 계속 프랑스어를 연습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꿈꾸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원어로 수월하게 읽을 수는 없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건 나를 또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간다.

고용 보장이 안 되는 시대. 이젠 퇴직 후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나는 퇴근 시간 후에 이런 일들을 하고 있을까? 뭐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가보다.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지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퇴근 후 자유시간까지 앞으로 먹고 살 걱정에 쓰고 싶지는 않다. 단지 지금 내게 활력과 재미를 주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넓혀주는 것들을 하며 흥이 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블로그(네이버, 티스토리)와 브런치에도 게재합니다.

윤봉길 의사 선서 사진 외국 언론사에 돌린 기자

 상해 전경사진(1932년 1월 30일 치 동아일보)
 상해 전경사진(1932년 1월 30일 치 동아일보)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중국 상해 김신부로(현 서금이로)에서 탄생한다. 이후 광복을 맞는 1945년 8월까지 고난에 찬 항일투쟁이 전개된다. 두 번째 청사는 하비로(현 회해중로)에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건물 외벽에 대한민국 태극기가 당당히 내걸리기 시작한다.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상해를 떠나는 1932년 5월까지 12차례 옮겨 다닌다.

대한민국 100년 역사가 시작된 중국 상해. 이역만리 이곳은 일제강점기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의 조계지가 있는 동양 제일의 국제도시였다. 이처럼 세계열강들이 치외법권을 누리며 자유롭게 통상 거주하는 상해는 독립투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상해에는 다양한 계층의 많은 한국인이 살았으며 한인촌도 존재했다.
 

 상해 한국인 업소들 신년광고(1926년 1월 7일 동아일보)
 상해 한국인 업소들 신년광고(1926년 1월 7일 동아일보)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옛날신문(1910~1940년대)에 따르면 당시 상해에는 금문공사, 삼덕양행, 해송양행, 원창공사, 용금양행, 남방공사, 신정양행, 흥원공사, 삼신무역공사 등 크고 작은 무역회사 및 물류 업체가 수십 개 진출해 있었다. 고려인삼 전문 취급점인 금문공사를 비롯해 임성공사, 동신공사, 려여공사 등은 두 번째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하비로’에 위치하였다.

조선과 서양 물산을 함께 취급하는 합자회사를 비롯해 병원, 양복점, 순모 라사 직수입점, 서점, 미용 재료상, 사진 재료상, 여관, 택시회사, 제과점, 댄스홀, 한식당, 경양식집, 그리고 고급요릿집(명월관, 평양관 등) 상호도 보인다. 1939년 11월 당시 한국인 거주자는 5천여 명. 그에 따라 규모와 업종이 다양한 한국인 점포도 수백 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교민들이 주머니를 털어 세운 조선인 학교(人成學校)도 있었다. 안창호, 여운형 등 임시정부 요인들 발의로 1922년 설립된 이 학교는 첫 번째 임시정부가 위치한 노만구 김신부로에서 개교, 노신부로, 홍강지로 등으로 옮겨 다니며 광복을 맞는다. 초기에는 여운형, 선우혁 등 임정 요인들이 초중등 수준의 교과목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거리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
 

 상해 서금이로와 회해중로가 만나는 사거리 풍경
 상해 서금이로와 회해중로가 만나는 사거리 풍경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기자는 지난 1일부터 8일까지 7박 8일간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관련 기사 :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첫날(1일) 일정은 오전 10시쯤 상하이 푸둥 공항에 도착, 점심을 먹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 서금이로(西金二路)와 두 번째 청사가 있었던 회해중로(淮海中路) 거리를 거니는 것으로 시작했다.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설명은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남북으로 곧게 뻗은 서금이로에서 시작한 것은 분명한데 청사 위치, 즉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과 첫 업무를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어서였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는 신영전 교수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는 신영전 교수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옛날 신문, 독립운동 기념관 등에서 봤던 1920~1930년대 상해 모습과 고층 건물이 빽빽한 지금의 거리 모습을 비교하고 상상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신영전 한양대학교 교수(임정로드 1기 탐방 단원)의 푸념 섞인 한마디가 가슴 한구석을 찡하게 했다.

“저희 아버지도 1933년경 이 거리 부근 한인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정확한 주소를 모릅니다. 동아일보 상해, 남경 특파원이었던 할아버지(신언준 기자)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귀국하였고, 1938년 1월에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가 태어난 거리를 걸으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부자(父子)의 정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이별한 두 분이 참 안 됐다는 생각도 들고요.”
 

신 교수는 “할아버지 신언준은 20대에 흥사단 간부로 도산 안창호 선생 비서와 임정 요인들이 세운 인성학교 학감을 지냈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국제 정세도 밝아 통역도 하셨고, 김구 선생을 도와 조선 청년들을 중앙군관학교에 입학시키는 임시정부 홍보요원 역할도 하셨다”라고 덧붙이며 사진과 기록으로만 만났던 할아버지 모습을 떠올렸다.

“저널리스트였던 할아버지는 마이너리티그룹에 관심이 많아 집창촌 등 하층민들 생활상을 글로 남겼습니다. 상해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이주자들과 독립투사들이 모여든 국제도시였죠. 그들이 노숙자처럼 거리를 배회하다가 쓰러져가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놓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동병상련’의 모습이었을 텐데요. 80~90년 전 아버지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거닐었던 거리라고 생각하니 온몸이 짜릿해지면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거사 직전 이봉창(왼쪽), 윤봉길 의사 모습. 두 의사의 선서 사진을 외국 언론사에 돌린 사람은 신언준 당시 동아일보 상해 특파원으로 알려진다.
 거사 직전 이봉창(왼쪽), 윤봉길 의사 모습. 두 의사의 선서 사진을 외국 언론사에 돌린 사람은 신언준 당시 동아일보 상해 특파원으로 알려진다.
ⓒ 신영전

관련사진보기

 
신 교수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에 찍은 선서 사진을 가장 먼저 외국 언론사들에 돌리고, 안창호 선생 체포 소식을 국내에 처음 알린 기자가 할아버지(신언준 기자)였다”라며 “할아버지는 잡지 <신동아>, <동광> 등에 ‘노신방문기(魯迅訪問記)’, ‘만주(滿洲) 문제를 둘러싼 일미(日美) 외교전’ 등 많은 취재기를 남겼다”라고 덧붙였다.

신언준 기자는 누구?

신언준(申彦俊:1904~1938)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1929년 8월부터 동아일보 상하이 특파원, 12월부터 남경 특파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오산학교 시절 3·1운동에 앞장서 참여하였고, 1920년대 초 상해로 건너가 항주 영문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오송 국립정치대학과 동오대학 법률과를 마친다. 중국 중앙일보(영자지) 논설위원, 상해 세계신문사 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26년 1월 <동아일보>에 글을 게재하였다.
 

 신언준 특파원이 본사로 전송한 1931년 7월 7일 치 동아일보 기사(만보산 사건은 조선 농민과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다)
 신언준 특파원이 본사로 전송한 1931년 7월 7일 치 동아일보 기사(만보산 사건은 조선 농민과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1925년을 보내고, 1926년을 새로이 맛는 이즈음에 당(當)하야 본지(本紙)는 특(特)히 만천하독자(滿天下讀者)의 신년(新年)의 의기(意氣)를 더 일층(一層) 고무경장(鼓舞更張)코저 내외(內外)의 일류명사(一流名士)를 강라(綱羅)하야서 각방면(各方面)에 긍(亘)한 논평(論評), 수상(隨想), 서사(叙事)의 모든 기사(記事)를 정선만재(精選滿載)하야 신세계창조(新世界創造)에 일대노력(一大努力))을 시(試)하려하오니..(아래 줄임)”
 

1925년 12월 30일 치 <동아일보>(1면) 예보 기사 앞 대목이다. 신문은 글 제목 <경제적(經濟的) 퇴패(頹敗)의 원인(原因) 대책(對策)> 필자를 ‘在(재) 上海(상해) 申彦俊(신언준)’이라 소개하고 있다. 신문에 소개된 일류명사(필진) 중 조병옥, 최남선, 윤백남, 이광수, 최두선, 김활란 등 낯익은 이름도 여럿 보인다.

안창호 선생을 보좌하던 신언준은 독립운동가들 추천으로 동아일보 상해, 남경 특파원이 된다. 이후 7년 동안(1929~1935)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 활동을 상세히 보도, 국내외에 항일 여론을 고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구 선생과 함께 중국 군사위원회와 교섭, 중앙군관학교를 통한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일제의 간계로 일어난 완바오산 사건(1931) 진상을 폭로, 한·중 간 민족충돌 확장을 막는 데 기여하였다.

신언준은 지병이 악화하여 귀국, 고향에서 요양하다가 1938년 1월 20일 유명을 달리한다. 당시 나이는 서른넷. 인생을 짧고 굵게 장식한 그에게 정부는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1998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신언준 선생이 독립운동 50년 만에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 포장을 받게 됐음을 알리는 1987년 9월 17일 치 동아일보 기사
 신언준 선생이 독립운동 50년 만에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 포장을 받게 됐음을 알리는 1987년 9월 17일 치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제이크 질렌할, 서울에 빠졌다…블핑 노래 들으며 ‘기분 UP’

할리우드 스타 제이크 질렌할이 첫 내한에서 서울에 푹 빠진 모습을 보였다.

영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프로모션 차 내한한 제이크 질렌할이 공식 일정을 앞두고 서울 나들이를 즐기는 모습을 SNS에 공개했다.

제이크 질렌할은 30일 한강공원 ‘I SEOUL YOU’ 장식 앞에서 찍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흥에 취해 어깨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더불어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블랙핑크 노래 ‘뚜두뚜두’를 듣고 있는 모습도 SNS 스토리에 올렸다.
이미지런던에 이어 서울을 찾은 제이크 질렌할은 오는 7월 1일 오전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주역 톰 홀랜드와 함께 기자회견 및 레드카펫 행사에 나설 예정이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엔드게임’ 이후 변화된 일상에서 벗어나 학교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떠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톰 홀랜드)가 정체불명의 조력자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렌할)와 세상을 위협하는 새로운 빌런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투모로우’, ‘페르시안 왕자’, ‘나이트 크롤러’, ‘옥자’ 등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제이크 질렌할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 매력적인 캐릭터 미스테리오로 분해 히어로 영화에 데뷔했다.

(SBS funE 김지혜 기자)

검찰이 황교안 아들 KT 특혜채용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이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62)가 아들의 KT 특혜채용으로 고발된 것과 관해 수사에 착수했다.

30일 검찰에 따르면 서울남부지검 형사6부(부장검사 김영일)는 민중당이 황 대표를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한 건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해당 수사부는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딸의 KT 부정채용 의혹과 관련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검찰은 김 의원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업무방해 혐의의 피고발인 신분으로 지난 21일 소환조사했다.

민중당은 25일 오전 ”황 대표가 권력을 이용해 KT가 그의 아들을 채용하고 인사이동을 하도록 했다는 의혹에 대해 수사해달라”며 서울남부지검에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한 바 있다.

민중당은 고발장에서 ”황 대표의 아들은 KT 임원면접에서 면접관 4명 모두로부터 ‘A’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직전 과정인 1차 실무면접에서 다수의 면접관에게서 ‘C’를 받은 것과 대조적”이라며 ”서류전형에서도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은 그는 ‘인적성검사’에서 상위 20%에 들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비판했다.

이어 ”황 대표는 아들이 입사한 2012년 당시 법무법인 태평양의 고문변호사로 있었으며, 태평양은 KT 임원들의 변호를 맡아왔다”며 ”황 대표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기 2달 전인 2013년 1월 그의 아들은 마케팅부서에서 법무부서로 인사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 ”마케팅부서와 법무팀은 업무의 유사성이 없음에도 황 대표가 법무부장관으로 내정될 즈음 법무팀으로 발령됐고, 1년도 안 된 시점에 부서 이동을 했다”며 ”더불어 당시 KT 윤리경영실장은 황 대표의 성남지청장 후임이었던 정성복 전 검사”라며 인사관리 업무방해 의혹을 제기했다.

앞서 황 대표는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열린 강연에서 ‘스펙’ 없이 특성화한 역량으로 대기업에 취업한 사례로 자신의 아들을 예로 들어 논란에 휩싸였다.

회담을 마친 트럼프가 “굉장히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0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동한 뒤 ”속도가 중요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과) 굉장히 포괄적인 딜(deal·거래)을 해야 한다”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58분께부터 49분간 김 위원장과 만남을 가진 뒤 이같이 말했다. 그는 ”오늘은 굉장히 역사적인 날”이라며 ”역사는 이런 시기를 정확히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면서 ”미국은 (북미협상을 위한) 팀을 만들 것이고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팀을 맡을 것”이라며 ”향후를 지켜봐주길 바란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측 또한 팀을 구성해 미측과 회의를 진행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김 위원장에게 ”적절한 시기에 미국으로 와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날 회동은 ”굉장히 긍정적인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앞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있었던 데에는 ”굉장히 작은 것이라 미사일 테스트라 간주하지 않는다”면서도 대북제재에 대해 ”언젠가는 없어지길 바라지만,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공화당이 광화문광장 천막 임시로 옮긴 사이 벌어진 일

뉴스1

우리공화당(전 대한애국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 일정에 맞춰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했던 천막을 28일 임시로 옮긴 가운데, 서울시가 30일 천막 재설치를 막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대형 나무 화분 80개를 설치했다.

서울시는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위해 비무장지대(DMZ)로 출발한 이후인 오후 2시쯤부터 공화당의 천막이 있던 자리에 조경용 수목이 심겨진 80개의 대형 화분을 가져다 놓았다. 작업은 오후 4시를 넘겨 완료됐다.

이번에 설치된 화분들은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좌우측으로 160m 구간에 3m 간격으로 설치됐다. 화분 높이는 3~4m에 이른다.

뉴스1

공화당이 트럼프 방한에 협조하겠다는 뜻에서 광장을 비운 사이 대형화분이 천막이 있던 자리에 들어오면서 공화당이 예전처럼 천막을 설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화분 설치 작업은 트럼프 방한 경호 목적으로 설치됐던 경찰 펜스가 철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져 작업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일부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이 광화문광장을 바라보면서 고함을 지르기는 했지만 물리적 마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서울시는 공화당이 불법으로 천막을 설치한 이후 운영하지 못했던 광장 분수도 전날(29일)부터 매시간(50분 가동·10분 휴식) 정상 가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불법 천막을 다시 설치해서 시민들이 통행에 불편을 겪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라며 ”이날 작업을 위해 500여명의 서울시 직원들이 동원됐다”고 말했다. 경찰 병력 1200여명과 소방차·구급대도 이날 화분 설치 작업에 동원됐다.

뉴스1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행사를 위해 청계광장으로 옮긴 우리공화당 천막. 

이에 홍문종 공화당 대표는 서울시가 대형화분을 설치하는 동안 ”화분을 설치한다고 해도 (천막 설치에) 상관은 없다”며 ”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와 김정은 판문점 만남은 ‘남북정상회담 재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30일 판문점 만남은 지난해 4월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첫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북-미 정상은 판문점 남북 정상이 그랬던 것처럼 군사분계선(MDL)을 사이에 두고 만나 악수한 뒤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유의 집’ 앞에서 두 정상을 기다렸다.

남북한과 미국 정상이 만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은 한반도 냉전과 평화가 교차하는 곳이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곳이자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출발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 9·19 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무기와 초소를 철수함으로써 비무장화가 이뤄졌다. 비무장화 뒤 자유왕래까지 합의했으나 남북과 유엔사가 공동근무 수칙을 마무리짓지 못해 이행이 늦어지고 있다.

북-미 정상이 악수한 군사분계선은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과 소회의실(T3)로 사용되는 파란색 조립식 건물 사이에 있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 이후 그해 10월 세워졌다. 66년째 사용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임시’(Temporary)라는 글자가 붙었다.

북-미 정상이 대화한 ‘자유의 집’은 남북회담 시설로 만들어졌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판문각’과 마주보고 있다. 남북회담 장소에서 북-미 정상이 만났다는 점도 흥미롭다. 4·27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평화의 집’은 자유의 집 뒤쪽에 있고, 5·26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통일각은 판문각 뒤쪽에 있다.

문 대통령와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공동경비구역 경비부대인 ‘캠프 보니파스’ 북쪽 최북단 ‘오울렛 초소’를 방문했다.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대통령도 이곳을 찾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1월 방한 당시 헬기를 타고 이곳을 방문하려다 기상 악화로 발길을 돌린 적 있다. 캠프 보니파스는 비무장지대에서 남쪽으로 400m 떨어져 있다.

[모이] 삼척기반 50년, ‘두타문학회’를 이야기하다

강원도 삼척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지역문학의 뿌리이자 원류인 ‘두타문학회’가 지난 24일에 50돌을 맞이했다.
 
현대문학 역사를 말할때 50년 역사는 그리 짧은 역사가 아니다. 문학역사를 100년 남짓 본다면 역사의 반을 영동지역과 함께 삼척문학의 원류로 걸어왔다고 볼 수 있다.
 
1969년 삼척문학회라는 이름으로 한 다방에서 출발한 두타문학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 중심의 활동보다 50년간 조직적 동인 활동을 펼쳐온 점이다.
 
이 문학회의 정체성과 회원들의 정신은 강원권 문학이다. 특히 영동권 문학을 성숙시킨 남다른 하나의 가치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문학회는 삼척지역에서 자생한 문학동아리로 창립년도부터 지금까지 매년 동인지를 발간하고 있다. 330회가 넘는 시 낭송회 개최와 지역주민 대상 의미 있는 문학생사를 지속적으로 펼쳐오고 있다.
 
두타문학회는 축전을 마련하고 총 42권의 동인지와 자료를 비롯해 회원 도자기 시화전, 김남조 시인을 비롯한 저명문인 50명의 육필 원고를 전시하고 있다. 
 
김익하 소설가는 ‘되돌아본 50주년 두타문학사’를 통해서 “50주년을 맞이한 두타문학회는 지역문학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작가에 대한 평가작업과 각종 문학행사의 새로운 접근 등 냉정한 평가와 단체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두타문학회 50주년 축전은 오는 7월 6일까지 삼척문화예술회관 1·2·3 전시실에서 각각 전시된다.
   
▶ 해당 기사는 모바일 앱 모이(moi) 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모이(moi)란? 일상의 이야기를 쉽게 기사화 할 수 있는 SNS 입니다.
더 많은 모이 보러가기

김정은은 왜 트럼프의 ‘깜짝 만남’ 요청에 응했을까?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깜짝 만남’ 요청에 전격 화답하고 나선 것은 만남의 시기와 형태, 명분까지 충분하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에는 하노이 회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비핵화 의지가 변함없음을 재확인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신뢰’를 과시하는 효과도 플러스 요인이다.

우선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초대에 응한 것은 올해 안으로 미국과 비핵화-관계 정상화 협상의 진전을 봐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시정연설에서 “올해 말”까지 “미국의 용단”을 기다리겠다고 밝히고는 계속해 미국 쪽에 “새로운 셈법”을 촉구해왔다. 그러면서도 북-러, 북-중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의지’와 함께 ‘대화를 통한 해법’을 강조하며 미국과 대화 재개 시점을 조심스레 타진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이런 가운데 최근 미국 쪽이 잇달아 발신한 대북 유화 메시지도 김 위원장이 움직이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리라 관측된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지난 19일(현지시각) “유연한 접근의 필요성”을 언급한 뒤 28일에는 “동시적·병행적” 접근법을 재차 확인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미 모두 올해 안에 성과를 봐야 한다”며 “비건 특별대표가 사인을 보내면서 양쪽이 동시적·병행적 접근법 또는 포괄적·단계적 접근법에 대한 일정한 컨센서스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올가을 2020년 미국 대선 정국이 본격화하면 협상을 재개할 계기를 잡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고려 요소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톱다운’ 정상외교를 선호하는 김 위원장의 입장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동은 멈춰선 북-미 협상을 재개할 가장 좋은 출발점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 위원장이 이날 깜짝 만남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과) 훌륭한 관계” 덕에 성사됐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만나러 가는 형식이어서, 하노이가 ‘빈손 회담’으로 끝나 국내 정치적으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던 김 위원장의 면이 서게 되는 이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풀이된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보러 디엠지에 온다는 것 자체가 명분이 될 수 있다”며 “(북한) 내부에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둘러싼) 회의감이 있다면 불식하고 북-미 정상 간 신뢰관계를 다시 상기해줄 수 있어 실익이 크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이날 오후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밝힌 공식적인 이유는 “앞으로 더 좋게 우리(북-미)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만남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김정은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백악관으로 초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CNN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DMZ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지금 당장 백악관에 초청하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즉답을 하지 않았지만, 트럼프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미국 땅을 밟는 첫 북한 지도자가 된다.

앞서 이날 오후 3시 46분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났다. 트럼프는 김 위원장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지역으로 걸어간 뒤 다시 군사분계선 남측으로 이동했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말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만나게 돼 영광”이라며 ”미·북간 많은 진전 있었다”고 했다.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이후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남측 자유의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짧은 3자 회동을 가진 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남측 자유의집에서 양자 회담을 이어나갔다. 

아래는 양자회담에 들어가기 전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전문이다.

김정은 위원장 : 나도 대통령 만나고 싶(었)고, 이 만남 자체가, 특히나 이런 장소에서 만나는 것은 북과 남 사이에는 분단의 상징이고 또 나쁜 과거를 연상케 하는 이런 자리에도 오랜 적대적 관계였던 두 나라가 만나는 것은 긍정적이다. 어제와 달라진 오늘을 표현하는 것이다. 앞으로 더 좋게 표현할 수 있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는 만남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또 앞으로 우리가 하는 행동에 긍정적 영향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이 존재하는 훌륭한 관계 아니면 하루만에 이런 상봉이 전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훌륭한 관계, 남들이 예상 못하는 좋은 일을 하면서 , 우리가 풀어 가야 할 일, 맞딱뜨릴 난관·장애들을 극복하는 그런 신비로운 힘이 될 거라 확신한다.

트럼프 대통령 : 저도 마찬가지로 감사의 말을 드리고자 한다. 목소리의 힘을 들을 수 있을 거 같다. 사실 이러한 목소리도 예전에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다. 굉장히 특별한 순간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말했지만 역사적 순간이다. 만남 자체가 역사적 순간이다. 저도 김정은께 감사한다. 소셜미디어로 메시지 보냈을 때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으면 제가 굉장히 민망한 모습이 됐을텐데, 이렇게 나와줘서 감사하다. 제가 넘어설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감사의 말씀 드린다. 초대해줘서 감사하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트럼프의 트윗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사실 난 어제 아침에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의향을 표현한데 대해 나 역시 놀랐고, 정식으로 만남을 제안한 것을 오후 늦은 시간에야 알게 됐다”며 ”우리 각하(트럼프 대통령)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훌륭한 관계가 아니라면 아마 하루 만에 이런 상봉이 전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앞으로 각하와의 훌륭한 관계가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좋은 일들을 계속 만들면서 난관과 장애를 견인하고 극복하는 슬기로운 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