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여자 따로 먹던 밥상, 20년 만에 합치다

작년 이맘때쯤 외조부모님 1주기 합동 제사는 필자의 집안에서 마지막으로 치른 가장 큰 제사였다. 어머니는 그 당일 퇴근한 몸을 이끌고 유과를 직접 만들고, 외조부모님이 좋아하셨던 반찬들을 하느라 새벽 세 시까지 요리를 하셨다. 나 역시 업무 파견 일을 조정하여 이틀 동안 서울-부산-강릉-서울을 이동하는 극한의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여성이 제사상을 다 차리면 절을 하라는 말을 집안의 제일 큰 남자 어르신이 외친다. 외조부모님 딸인 우리 엄마보다 ‘더 먼 촌수’인 외할아버지 여동생의 남편이 재빠르게 앞서 서고, 이를 이어 나의 두 외삼촌(외조부의 아들), 외할아버지의 사촌 아들들이 섰다. 그 뒤를 뭉그적거리며 외숙모(외삼촌의 아내)와 엄마, 남은 여성들이 섰다. 뛰놀던 아이들도 ‘자연스레’ 질서를 따라 여자 아이들은 뒤에 남자 아이들은 앞에 섰다.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그래 우리 집은 보수적이었지. 사촌여동생의 등을 부추겼다. “앞에 가서 서~” 말괄량이인 초등학생 1학년인 내 여사촌도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잡은 손을 거부했다. 그제야 나는 엄마 손을 잡고, 하루종일 요리했을 외숙모의 손을 잡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른들이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니 사촌 여동생들도 슬그머니 옆에 섰다. 아재는 “그래, 느그가 앞에 서는 게 맞지” 하며 비켜서 주셨다. 그렇지만 외삼촌은 “그렇게 뒤에 서는 게 억울하더나. 앞에서나 뒤에 서나 똑같다”라는 주옥같은 말을 남기셨다.

안방에서 절을 할 때는 등으로 견고한 벽을 쌓던 그 남자들이 제사가 끝나면 재빠르게 마루에 밥상을 펴고 안방을 여자에게 내준다. 그러면 여자들은 고기를 자르고 생선을 바르고 그릇에 요리를 덜어낸다.

 

 기념으로 찍어둔 사진. 가족들 초상권 보호를 위해 포토샵 처리를 했다.
 기념으로 찍어둔 사진. 가족들 초상권 보호를 위해 포토샵 처리를 했다.
ⓒ 고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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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여전히 여자, 남자 밥 먹는 테이블은 달랐다. 남자들은 마루에서 서열대로 위에서부터 앉았고 맨 아래 테이블에는 아이들이, 아예 숙모들과 엄마는 부엌에서, 할머니들은 안방에서 식사하셨다.


나는 안방에서 고모할머니들께 할아버지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라고 권했다. 남자들 먹일 생선과 고기들을 자르던 도마와 주변에 널부러져 펴있던 신문지 위가 “편하시다”라고 손사래를 치던 고모 할머니들의 등을 거의 떠밀다시피 해서야 할머니들이 마루로 나오셨다.

남정네들의 그 견고한 엉덩이를 비집고 자리를 만들어 드렸다. 그곳에서 할머니들은 자신의 사촌오빠들과 웃으며 그들의 생 처음 제사 때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나의 생 20년 만에 이뤄낸 일이 그들의 생에서는 8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것도 나의 외조부님이 다 돌아가고 나신 뒤에서야.

그 등을 떠밀고는 나는 홀로 앉아 과일을 깎아 날랐다. 나의 할머니들이 평생에 걸쳐 이뤄내지 못한 일들을 같이 이뤄냈다는 벅찬 마음과 그들의 자리를 위해 내가 다시 노동해야 하는 서글픔 속에서 나는 위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성차별은 고루한 이야기?

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이들이 놀라고, 아직도 그런 집이 있냐고 물어본다. 이러한 반응은 성차별이 많이 완화되었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 듯하다. 따라서 필자의 경험은 소수의 경험이고 보편적으로는 통용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며, 성평등 시대에 도래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여전히 61.9%가 시댁을 먼저 방문하고 4.2%만이 친정을 먼저 방문하고 시댁을 방문한다. 시댁만을 방문하는 경우인 5.4%보다도 적은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집안만 하더라도 외조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전통적인 성차별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제사도 줄었고 하더라도 훨씬 간소화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여성과 남성의 화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필자의 외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안방 신문지 위에서 고운 한복을 입고 생선과 고기를 잘라야만 했다. 나는 매년 어린 사촌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서빙을 했으나 나의 사촌오빠는 쉬며 게임을 하고 밥을 먹었다. 

여기에 대한 성역할에 대한 반성 없이 단순히 현상만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 집에 남아있는 성차별 인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맞섰던 그 위계 질서에 삼촌이 내게 “그렇게 뒤에 서는 게 억울하더나. 앞에서나 뒤에 서나 똑같다”라는 말을 끝으로 그는 그 일에 대해서 더는 반성할지 하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나의 한걸음에 함께해준 고모할머니, 엄마, 외숙모, 여동생들의 용기로 마지막 제사에서 약간의 심리적 위안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큰삼촌과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채로 끝나버렸다.

이제 우리 집안의 제사는 서서히 그 효력을 잃어갈 것이고 간소화될 것이고 실제로 간소화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성차별에 대한 사회적 반성과 자각 없이는 언제든 새로운 형태의 여성차별이 등장할 수 있다. 성차별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형태의 여성차별에 둔감하게 살아갈 수 있다.

여성 문제는 여성만이 바뀌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남성과 함께해나가는 문제다. 이 문제에 있어 지금 한국에서 여성과 남성이 인지하는 여성인권의 온도 차는 너무나 극명하다.

이를 위의 왕따의 사례로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면 이 온도 차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왕따는 그 누구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정신적 피해와 두려움을 느낀다. 하교한 상황에서도 내일 등교를 걱정하고 타인이 불편해 할 만한 행동을 모두 계산하며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피해는 존재하지만, 그 어떤 가해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이게 여성 차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사자가 아닌 남성들은 더더욱 이 소극적 차별에 자신이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운 구조에 있다. 그렇기에 여성과 남성의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이다. 사람들과 일조했던 명절의 성차별적 전통이 많이 줄어가고 있다고 해서, 여성차별이 해결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 

잘못된 과거를 단순히 덮어두고 없애버리며 더 이상 이 현상이 없다고 치부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는 또다시 새로운 차별의 현상들을 자리잡게 할 것이다. 과거와 전통을 바탕으로 미래를 위해 논의하고 나아가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세상의 약자와 함께하고 세상의 차별에 저항하겠습니다.

홍길동도 아닌데… 왜 부끄러워야 하죠

교실 창문이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가려져 있는 것만으로도 여기구나, 동아리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놀라운 환호로 맞아주었다. 지금껏 살면서 내가 이토록 큰 환호를 받아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벅차도록 밝은 기운이었다.

이리여고 독서동아리 ‘미쓰리딩’과의 생리간담회. 내가 활동 중인 ‘언니들의 병원놀이’에서 진행한 ‘생리콘서트’의 십대 버전에 대한 기획회의를 겸한 자리였다. 십대로, 학생으로, 이 시기를 살고 있는 자신들의 경험과 화두를 통해 스스로 몸과 건강권을 말할 수 있도록. 학생들 스스로가 주체로서 함께 만들고자 하는 취지였다.

나와 이들의 ‘생리’는 어떻게 같고 다를까. 생리콘서트 당시 나눴던 내용을 짧게나마 공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나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로서, 만나는 여성들마다 자신의 몸에서 매달 겪는 일임에도 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거의 없는 현실을 공유했다.


또한 여성의 몸을 재생산 도구이거나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과, 이로 인해 여성의 몸과 생리 자체에 혐오적 인식이 덧씌워지고 있음을 짚어 보았다. 이는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성교육 교과서에도 명백히 드러나 있었으며, 올바르고 실질적인 성교육이 반드시 필요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국민의 절반이 반드시 겪고 있으며 그 과정 자체가 국가의 재생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서도, 정작 독성생리대 파동은 국민이 결코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확인시키는 것으로 종결되었음을 상기했다.

생리컵과 면생리대 등 다양한 생리용품을 선택할 권리는 보장받아야 하지만, 일회용 생리대가 위험하기 때문에 ‘생리난민’처럼 피해가는 선택이어서는 안된다. 모든 생리용품은 그 안전성을 보장받아야만 하고, 선택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는 논의를 되짚었다.

그건 형벌이 아니다

 

 동아리 교실 칠판에 쓰인 낙서. 자조적인 듯 하지만 당당한 환영 인사가 그동안 받아온 '핍박'을 가늠하게 한다.
 동아리 교실 칠판에 쓰인 낙서. 자조적인 듯 하지만 당당한 환영 인사가 그동안 받아온 “핍박”을 가늠하게 한다.
ⓒ 박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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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는 임신에 실패한 여성에게 내려진 형벌이 아니다. 여성의 몸은 아이를 낳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성기가 삽입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역시 더더욱 아니다. 생리와 여성의 몸은 수치스러운 것도 숨겨야 할 것도 아닌, 내 자신의 삶일 뿐이다. 스스로 내 몸의 주체로서 내 몸에 대한 선택을 보장받아야 하며, 국민의 당연한 권리로서 그 모든 선택에 대해 안전성을 보장받아야만 마땅하다는 선언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얼굴에, 탄성에, 때때마다 환호와 안타까움, 답답함과 분노가 여과 없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도, 혹은 보여서는 안된다는 검열도 없는 솔직한 감정 그 자체. 이런 반응이 나는 너무나 낯설도록 오랜만이었다.

이들의 이 감정이 진실이다. 소위 ‘어른’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갈수록 이 진실을 감추고, 다듬고,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는 것을 배우고 익힌다. 그 과정에서 때로 진실은 무엇이었는가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더 많은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특히 청소년의 목소리가 이렇듯 자신의 진실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청소년은 당연히도 자신의 정치적 주체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어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주된 화두는 생리공결 제도였다.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로 시작된 생리공결제는 올해 12년째다. 그러나 여전히 규정된 절차 없이 각 학교별 자율적으로 시행되며 학교장 혹은 담당교사가 재량껏 판단하고 있어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오히려 절차를 더 복잡하게 하여 신청 자체를 어렵게 해야 한다는 교사들까지 있다. 생리결석을 신청했음에도 일방적으로 교사가 병결로 바꿔버린 사례도 있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뜻밖에도 “얄미워서”라는 답변이 왔단다. 매달 (생리공결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게 얄미워서. 부모님은 행여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생리 때문에 늦는다고 했는데, 선생님이 거짓말 같다고 반 아이들에게 말했어요.”
“장난전화를 한다고 119를 없앨 수는 없잖아요. 의심스럽다고 생리공결을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오라고 했어요. 병원에 가봐야 생리통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가는 것만 힘들고, 그냥 참고 말았어요.”
“선생님이 거짓말 같다고 하면 그냥 어쩔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고 생리공결을 받을 수 있다는 의심의 시선도 있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개인의 권리이고 선택이어야 한다. 결석으로 인해 수업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결과는 개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왜 못 참냐고 해요” “생리공결 쓴다고 눈치 줘요”

선택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이 아닐까. 타 학교에서는 생리공결을 받으려면 사용한 생리대를 보여달라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듯 수치심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교육일까. 객관적 증명이 어려운 상황에서, ‘의심스럽다’는 교사의 개인적 판단만이 불용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고에 다니는 친구는 생리공결이 인정이 안된대요. 출석이 성적에 중요하게 반영되는데, 생리통 때문에 너무 아파서 조퇴하려고 하는데 부모님이 절대로 안된다고 했대요. 계속 울면서 학교에서 참았대요.”
“중학교 때는 생리공결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들어본 적도 없어요.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도 거의 모른대요.”
“1학년 때는 생리공결을 잘 썼는데, 2학년 와서 (선생님이 바뀌면서) 잘 못쓰겠어요. 왜 내가 생리하는데 눈치를 봐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생리공결 쓴다고 눈치 주는 선생님들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학교에 따라, 같은 학교에서도 교사에 따라, 생리공결이 인정되는 상황은 천지차이였다. 생리공결 제도는 인권의 차원에서 보장된 권리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눈치가 보여서’ 지레 포기한다. 생리공결을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매번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야 한다. 왜 내 몸과 내 고통을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생리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 권한을 쥐고 있는 게 이상해요.”
“생리는 1주일씩 하는데, 생리통이 보통 이틀씩 심하잖아요. 그런데 왜 생리공결은 하루 밖에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생리를 한 달에 두 번 할 때도 있는데, 사람마다 생리주기도 다 다르고. 그런데 한 달에 두 번 신청하면 안된대요. 거짓말이래요.”
“양호실에 가도 약을 안줬어요, 약 먹으면 ‘여자’ 몸에 안좋다고.”
“선생님한테 ‘생리 터졌다’고 했더니 그런 나쁜 말을 쓴다며 혼났어요.”
“왜 못참냐고 해요. 그것도 못참으면서 나중에 더 힘든 일은 어떻게 참을 거냐고.”
“중학교 때까지는 생리가 부끄럽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와서 선생님 말을 듣고 생리하는 게 부끄러워졌어요.”

생리와 여성의 몸에 씌워진 혐오와 편견들이, 교사들에게서 학생들에게 그대로 내비쳐진다. 그 혐오가 학습된다. 정상 생리주기 자체에 대한 무관심. 생리통이 있으면 참는 것이 당연하다는 무지. 생리는 더럽고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 고통은 참고 견뎌야 마땅한 것이라는 강요. 무엇보다, 학생은 약자이고 ‘너에 대한 여타의 권한은 내가 쥐고 있다’는 폭력. 이것이 교육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야 옳은가.

“생리컵을 써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런 건 애들이 쓰는 게 아니’래요.”
“학교에 생리대 자판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자판기가 있더라도, 사실 오래된 거 아닌가, 위생관리는 되는 걸까, 불안하고 그래요.”
“공용 생리대를 구비해두고 썼으면 좋겠어요. 생리대 기부함처럼, 사물함 위에 통을 만들어 놓고 누구라도 쓸 수 있게.”

예전 생리콘서트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자신이 영국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고 밝히며, 초등과정 성교육에서부터 생리에 대해 남녀가 함께 구체적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생리대 뿐만 아니라 탐폰, 생리컵 등 다양한 생리용품에 대해 교육받았고 자신은 이후 쭉 탐폰을 사용해 왔으나, 한국에 와보니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전북도교육감 선거 당시 생리대 무상지급 공약이 있었으며 현재 추진 중이라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생리란 본인의 선택이 아닌 신체적 조건으로 발생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이 결과적으로 국가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더욱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역시 일회용 생리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탐폰과 생리컵 등 개인의 다양한 선택을 지원하는 방식이기를 바란다. 적어도 지속적으로 재사용이 가능하고 독성물질에 있어 안전한 생리용품이 있다는 것과, 이에 따라 자신의 몸에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은 필수적인 것이 아닐까.

 


   
“남녀공학 중학교에서는 생리한다고 말을 못했어요. 생리대를 숨기고 다니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상해요.”
“인류의 절반에게 일어나는 일인데, 왜 숨기고 부끄러워야 하죠?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말하고 싶어요.”
“생리를 생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죠. 무슨 (호형호제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홍길동 얘기에 모두 왁자지껄하게 웃는다. 서로의 얘기를 경청하고 끄덕이며 박수로 지지한다. 내가 아니라 세상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말해도 괜찮다는 것. 들어주고 지지해 주고 함께 바꾸어 나가고자 힘을 모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교육이 아닐까.

이 동아리 ‘미쓰리딩’ 학생들의 중심에는 인권과 페미니즘을 끝없이 고민하고 진심으로 공감하는 담당교사가 있다. 교사 한 명이 학생들에게 수치심과 폭력과 굴종을 가르칠 수도, 세상을 만들어 갈 힘을 가르칠 수도 있음을, 나는 이곳에서 보았다. 우리에게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한 이유다.

“생리공결도 권리니까 많이 알고 누릴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생리복지가 잘 이뤄지면 좋겠어요.”
“내 자신이 생리주체로서 용기를 내고 싶어요.”

마지막 소감을 물으니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 이미 스스로 훌륭한 정치적 주체이자 시민이다. 이들과 함께 만들 또다른 생리콘서트가 두근두근 기대된다. 또 어떤 신나는 균열이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 일어날까.

*생리의 원래 명칭은 월경이었다. 하지만 혐오적 인식과 금기로 인해 월경이라 직접 지칭하지 못하고 생리적 현상을 뜻하는 생리로 불리게 되었기에, 본 명칭인 월경으로 불러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 하지만 지금 더 익숙하게 사용되는 명칭인 생리에 오히려 기존 명칭의 터부가 그대로 옮겨왔기에, 이러한 금기에 저항하고자 ‘생리’라는 용어를 선택해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에도 실립니다.

“민선7기, 경남여성정책 달라지나?” 토론, 24일

경남여성단체연합은 오는 24일 오후 2시 경남도의회 대회의실에서 “민선7기, 경남여성정책 달라지나?”라는 제목으로 ‘성평등 정책 토론회’를 연다.

김윤자 경남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가 좌장으로, 심인선 경남발전연구원 위원이 “경남 민선7기, 여성정책 변화 계획과 방향 설정”에 대해 발제하고, 이경옥 경남여성단체연합 부설 여성정책센터장, 문지은 김해여성의전화 여성정책센터 연구위원, 이화재 경남여성회 여성정책센터 연구위원, 이정희 경남여성단체연합 부설 인권위원회 위원장, 김상희 김해여성회 여성정책센터 연구위원이 토론한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양공주’, ‘양색시’라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했던 위안부 여성을 일컬었던 멸칭이다. 이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발적 성매매자로 낙인된 미군 위안부들은 박탈당한 인권에 대해 말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발적 성매매의 자발성은 구조적 허위에 불과하다. 당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들여다보면 세간의 주장인 ‘자발성’이 얼마나 허약한지 여실히 드러난다. 전후 부모를 잃은 고아,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소녀 가장들이었으며, 공장에 취업시켜준다는 직업소개소의 사기에 속은 이들도 있다.  

이들의 상당수가 미성년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설사 자발적으로 일을 시작했다하더라도 일단 들어가게 되면 노예나 다름없는 감시와 착취로 그곳을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면 인신매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아라고 소녀가장이었다고 다 양공주가 됐느냐고. 물론 아니다. 그러나 남성인 고아나 소년가장이 성노예로 착취당한 역사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미군 위안부들이 ‘젠더 폭력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파주 소재, 당시 위안부 여성들의 거처
 파주 소재, 당시 위안부 여성들의 거처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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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소재, 당시 위안부 여성들의 거처
 파주 소재, 당시 위안부 여성들의 거처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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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의 보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의 안전한 성생활을 위해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철저히 관리한다. 이것은 일제가 일본군의 성병관리와 주둔지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억제하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해 위안부를 관리하던 행태와 같다.


미군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주둔하자 한국정부는 미군을 달러벌이의 화수분으로 삼는다. 민간업자(포주)를 앞세워 미군들을 상대할 여성들을 대거 포집, 곳곳의 기지마다 배치해 달러를 벌어들이게 했다. 외화벌이의 주역인 ‘애국자’라는 허울을 씌어 오래도록 국가 경제에 복무시키는 동시에, ‘양공주’라는 낙인을 찍는 ‘이중 구속’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기지촌은 달랑 윤락업소 몇 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져 있는 마을에 미군과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매개로 한 각종 서비스업이 침투해 들어오며 응집된다. 마을 사람들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성을 이용한 돈벌이로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가져다 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노예처럼 등한시됐고, 포주, 업주의 농간과 착취, 주변인들의 차별에 따른 불명예와 소외로 사람답게 숨 쉬며 살 수 없었다. 정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구조적인 착취가 이루어진 것이니, 기지촌 구성원이었던 한 개인의 탓은 아니라고 눙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삶이었다 해서, 동시대를 참담하게 살았던 여성들에 기대 누렸던 개개인의 빚진 삶을 도덕적 성찰 없이 그냥 ‘모두 다 어려웠던’ 시대였다고 봉인할 수 있겠는가?

 

 당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성병 검진소, 파주시 소재
 당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성병 검진소, 파주시 소재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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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권이었던 ‘달러 골목’, 파주시 소재
 당시 상권이었던 ‘달러 골목’, 파주시 소재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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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했던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침탈당한 인권에 대한 담론이 충격적으로 촉발된 건 1992년 동두천 윤금이씨 살인 사건이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권, 젠더 감수성의 토양이 저급했던 토대에서 미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한 윤금이씨의 죽음은, 미군 위안부 여성의 인권유린에 천착하기 보다는 선정적 보도와 함께 ‘양키 고우 홈’이라는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부정의한 상황을 초래한다.

마치 미군이 없다면 성매매가 사라지는 건강한 성 의식의 국가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윤금이씨 사건을 계기로 각 계 시민단체, 여성인권 활동가, 연구자등이 공론화를 본격화하고, 2008년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침해당한 인권에 국가가 개입, 방조했음을 밝히는 연대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축적된 연구와 자료 발굴로 2014년 미군 위안부 여성 122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2017년 1심 판결에서 국가 폭력을 일부 인용하는 판결이 나왔고, 2018년 2심 판결에서 국가가 성매매를 조장한 것과 조직적 폭력적 성병관리의 위법성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좀 더 폭넓은 미군 위안부 여성의 인권과 지원을 위해 3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2차대전 뒤 ‘독일인의 여자’가 됐다며 수만 명의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한 국가의 잘못을 “정부 이름으로 사과”한 노르웨이 정부의 행보는 한국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쓸쓸한 노년을 맞고 있는 기지촌 여성들의 건강상태는 동년 여성들에 비해 매우 나쁘다. 게다 ‘국가 폭력’임이 법원 판결로 인정됐음에도, 자발적 매춘이었다는 오래된 주홍글씨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삶에 여전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은폐된 역사에 대한 진실 규명이 절실할 뿐 아니라 고령으로 심신이 위기에 처한 미군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지원을 국가 차원에서 시급히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이 지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동맹국이라는 군사적 위치를 빌미로 주둔국에 집창촌을 형성하게 압력을 넣고 자국 군인들의 적극적 성 매수를 도운 미국의 책임은 없는가? 그리고 다시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가지게 된다. 한국이 베트남에서 행한 전시 성폭력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2015년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베트남의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위로 그리고 연대의 마음을 전하고자 베트남을 방문했다. 또한 수 년 전부터 민간단체인 한베평화재단은 한국군에 의한 전쟁 폭력 피해자들을 찾아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이는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시 폭력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의 피해에 대한 우리의 문제 제기는 윤리적 우위를 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지촌은 다 사라진 걸까? 아니다. 90년대부터 한국 미군 위안부 여성이 대거 빠져나간 자리를 외국인 여성들이 채우고 있다. E6 비자를 받고 공연예술가로 입국한 이들은 실상 대부분 성매매로 생계를 잇고 있다. 외국인 여성들에게 비자를 발급해놓고 업주들이 벌이는 위법을 감시 관리하지 않는 당국은 이들의 성매매를 정말 모르는 걸까? 이래서는 안 된다. 한국인 여성들에게 해서 안 되는 일은 그 어느 나라의 여성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을 매개하지 않은 전쟁은 없다. 여성의 몸을 식민화하는 남성들의 공고한 연대는 전쟁이 있는 그 어느 곳에서든 사라질 줄을 모른다.

 

 파주시 일부 반환된 미군 기지에 조성된 ‘엄마 품 동산’. 당시 미군 위안부들과 해외로 입양된 자녀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파주시 일부 반환된 미군 기지에 조성된 ‘엄마 품 동산’. 당시 미군 위안부들과 해외로 입양된 자녀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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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시 일부 반환된 미군 기지에 조성된 ‘엄마 품 동산’. 당시 미군 위안부들과 해외로 입양된 자녀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파주시 일부 반환된 미군 기지에 조성된 ‘엄마 품 동산’. 당시 미군 위안부들과 해외로 입양된 자녀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 윤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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